내가 멍 때리는 것처럼 보여?
라떼 얘기를 좀 해야겠다. 주 7일 중, 월화수목금토를 출근했다. 일요일은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는 프랑스어와 약간의 영어였는데, 일본어를 써야 하는 회사에 입사를 했으니 새벽에 어학학원에 가서 일본어 수업 두 타임쯤은 거뜬하게 들었다. 퇴근시간이 지난 후에는 당연하게도 "밥 먹듯 하는 야근'이라는 걸 했다. 야근을 하다가 길어지는 날에는 자정을 넘겨 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것이 그냥 당연한 줄 알았다. 내 주변에 정통(?) 의상 디자인을 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친구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회사에 다니던 나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했다. 라떼는 그랬다.
그랬던 내가 유유자적한 듯 치열한 시간을 거쳐 퇴사한 지 10년 만에 회사를 시작했다. 그간 지원사업도 하고, 지자체, 기관에 입찰도 참여해 보고, 강사로도 활동하며, 컨설팅을 하는 개인사업자로 두서없이 일하다가 새로이 법인을 설립하고 시스템과 매뉴얼을 갖추려 하다 보니 크루들과 함께 여전히 좌충우돌 중이다.
나는 어떤 회사를 꿈꾸었을까?
특히나 우리는 브랜드 기획을 필두로 브랜딩과 조직개발, 일부 마케팅의 업무를 진행한다. 기본적으로 사업은 누군가의 결핍을 해소해 주는 일이고, 브랜딩이나 마케팅의 영역은 특히 더 그러하다. 일하는 방식, 사고의 전환에선 특히 더 크리에이티브 한 것이 중요하다보니 더 나은 해결책이나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라면 멍 때리기도 좋고, 영화감상도 좋고, 전시회를 보러 가도 되고, 소파에 잠깐 기대 낮잠을 청해도 된다. 업무에 차질만 없다면 여행을 가도 좋은 자유로운 회사를 지향하고 있는데 최근엔 조금씩 급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지향하는 미션과 비전이 있고, 그에 따른 성과목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세팅이 있다. 내가 건설팅이나 강의에서 늘 얘기하듯, 그것만 확실하다면 굳건히 나아가야 하고, 그게 확실할수록 브랜드 내외의 애티튜드가 착착착 정리될 터이니 그런 브랜드를 경험한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된다. 프로세스는 그러하나 인간사가 뭐 그리 쉬운가? 특히나 마음 말이다. 만족스러운 성과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지 않으면 고객도 나도 마음에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지난주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와, 전기와 난방을 켜진 채 급히 점심식사를 나간 공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눈에는 분명 이 공간은 늘 바쁘고 창의와 아이디어, 때로는 숨죽인 열정이 가득하다. 물론, 누군가는 주구장창 책을 찾거나 소파에 앉아 졸기도 하거나, 맥없이 간식 장을 뒤지는 모습도 있긴 하다. 암튼, 왜? 뭔가는 하는 것 같은데 결과가 안 나오는 거지?라는 인식이 드는 걸 보니 예전에 마냥 꼰대처럼 느껴졌던 첫 회사의 사장님이 떠오르기도 했다.
정기출금
사업을 확장하며 공간을 추가로 임대하게 되고 내 기준에서는 꽤나 많은 금액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수입은 있다. 아, 냉정하게 말하자면 수익이 아니라 수입. 즉, 매출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현금 흐름이 시작되었으니 임대료를 내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오랫동안 정부지원사업을 해 오면서 내본 적이 없는 돈들이 나가기 시작하니 그걸 챙기는 것만으로도 매일 현실을 깨닫는 중이다. 관점만 살짝 바꿔보면 '나는 건물주를 위해, 한전과 KT를 위해, LG(정수기, 공청기)를 위해, 통신사와 각종 디자인 툴 회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우리. 진짜로 빡세게 하고 있나?를 돌아보고 있다. 인풋 대비 아웃풋의 효율. 사업을 운영한다면 당연한 얘기다.
각자가 맡은 역할 안에서 어느 정도의 효율을 내고, 어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을까? 누군가는 일당 백을 하고, 누군가는 일당 십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리더는 일당백의 인원들로만 팀을 구성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천하무적의 팀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두가 함께 가기 위해 새는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아무래도 월 정기 출금이 되고 있는 비용들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 때면 내가 너무 찌질해지는 것 같아 이내 생각을 털어내곤 하지만... 전체 구조를 그리며 멍해질 때가 종종 생기고 있다. 그럼에도 결론은 늘 같다. 함께 즐겁게 일하며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면 좋겠다는 것. 그것만 해결할 수 있다면, 생각과 상상은 얼마든지 유토피아를 지향해도 좋은 것이 아닌가.
바이크쉐딩
공간은 항상 비용이 나가고 있는 곳이고 우리는 거기서 일을 해서 돈이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운영하는 세 개의 공간 중 가장 메인이 되는 공간은 오픈형 공간으로 운영되며 모여서 일을 할 때는 큰 테이블에서 각자의 일을 하다가도 이슈가 생기면 문득 회의가 되거나 종종 커피챗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효율"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어디선가 읽은 바이크쉐딩이란 단어였다. 바이크쉐딩은 지금 당장 중요한 현안들을 미뤄둔 채, 덜 중요한 일에 대해 깊이 의논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하고 누군가 우리 조직을 본다면 몇몇은 바이크쉐딩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싶다.
하지만, 일에는 여러 형태의 소통이 필요하다. 외국의 유명 회사들도, 울나라에서는 배달의 민족이 그런 형태의 소통을 장려한다고 많이 알려져 있다. 중요한 듯 보여도 본질에서 벗어났다면 바이크쉐딩일 수 있고, 덜 중요한 듯 보여도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면 아이데이션이 될 수 있다.
그러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 때문이다. 돈의 속성 저자이신 김승호 스승님은 모든 것은 사장 탓이라고 하셨고, 사업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모두가 이런저런 걱정 없이 맘껏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고, 그걸 이루기 위해 나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할 만큼 올인하고 있는지를 우선 물어야 한다.
전체 맥락 안에서의 우선순위
일할 때 혹은 회의 등을 할 때, 어떤 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중요도나 급하기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지만 지금 내가, 우리 조직이나 우리 팀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판의 구조를 이해하고, 일의 맥락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 방향이나 목적성을 알지 못한 채, “뭐라도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본질에서 벗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팀에서는 특히, 누군가 전체의 맥락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소통이 끊기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래서 조직이나 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방향 설정이고, 충분한 소통을 통해 모두 함께 팀의 목적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맥락 안에서의 스스로를 관찰하고 성찰하며 전체의 방향에 맞는 개인적 숙련을 하는 것이 다음이다.
개인의 우선순위는 프로가 되는 것
사업의 전체 구조, 그리고 흐름의 맥락에서 본다면 개인도 그 안에서 프로로 향해가는 개인적 숙련이 필수적이 된다. 개인적 숙련이 필수적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선 다른 크루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전체의 임계치와 능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눈앞에 있는 일에 매몰된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일을 쳐내는 데 급급하며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동의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함께 가는 곳을 향해, 도전하고 견뎌내고 해내는 개인적 숙련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고 희생하고 쓰여버린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일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지는 거니까.
그러니 개념만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개인적 숙련을 위한 것이라면 바이크쉐딩이든 멍 때리기 든 안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말자. 우리는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 팀을 믿자. 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그보다 우선, 나는 이런저런 생각과 일정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지만 누군가에겐, 하는 일 없이 멍 때리며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비칠 나의 모습부터 점검해 본다.
이래도, 내가 멍 때리는 것처럼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