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매와 함께 글을 씁니다.
"엄마, 우리 이거 다시 써요."
딸아이가 나와 함께 쓰는 교환 일기장을 가져왔다. 최근 몇 달은 쓰는 걸 잊고 있었다. 교환일기는 아이가 5살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한글도 몰랐던 꼬마와 교환 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건 아이의 마음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다. 교환 일기는 꽤 효과가 있었다. 딸은 자기 욕구를 표현할 땐 머뭇거리거나 한참 생각하곤 했지만, 교환 일기장에 그린 그림을 설명할 때는 마음을 보다 쉽게 표현했다. 나도 아이의 마음을 읽는 데 도움이 됐다. 교환 일기는 엄마와 딸이 함께 남기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첫째가 한글을 읽어갈 무렵부터 세 아이와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을까?" 내가 던지는 질문에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삼총사의 상상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갑자기 악당과 마주친다. 주인공은 위기에 몰리지만 반드시 승리한다. 어제도 오늘도 비슷한 스토리 같은데 늘 처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떠 있는 아이들.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진지하게 받아 적었다. 어떤 날은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이 어린 시절에 자주 했다던 이어 그리기 게임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번갈아 가며 그린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었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서 한 마디씩 하다 보면 어느새 "행복하게 살았대요."로 마무리됐다. 불 꺼진 방에 나란히 누워 돌아가며 한 문장씩 동화를 짓던 밤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엉뚱하고도 사랑스러운 생각들이 방 안 가득 데워진 공기 같았다. 셋의 보석 같은 말을 다 써 놓지는 못했지만 군데군데 아이들과 나와의 기록이 남아 있다.
4년이 지나 첫째와 둘째는 글쓰기를 즐긴다. “엄마, 제 글 좀 읽어 보세요!" 내가 글을 읽는 동안 뿌듯한 표정으로 옆을 지킨다. 난 어린이 작가에게 궁금한 점도 질문하고 인상적이었던 부분도 이야기해 준다. “엄마, 제 이야기 좀 써 주세요!” 한글을 막 배우기 시작한 막내 역시 형과 누나 못지않은 이야기꾼이다. 막내의 상상력에는 언제나 물개 박수로 반응한다. 이렇듯 글쓰기를 통해 아이와 내가 깊이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난 여세를 몰아 아이들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서로 더 다정해지고 더 끈끈해진다. 아이들은 책 사이, 가방 안, 식탁 위에서 발견한 엄마의 메시지를 참 좋아한다. 아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은 사르르 녹고, 처진 어깨는 쓱 올라가니 편지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저도 엄마처럼 블로그 하고 싶어요." 10살인 첫째는 얼마 전 블로그를 열었다. 아들은 평소 내가 서평을 쓰거나, 자기 사진이 들어간 글을 쓸 때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블로그를 해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부탁하던 걸 이제야 들어줬다. 막 블로거가 된 오빠를 따라 9살 둘째도 블로그를 열었다. 각자의 관심사를 주제로 한 글을 블로그에 채울 예정이다. 곤충 이야기 혹은 발레 이야기, 나니아 연대기 패러디 또는 빨간 머리 앤 패러디 이야기를 차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크면 엄마처럼 블로그에 글을 쓸 거라더니 어느새 그날이 다가왔다. 아이가 한글을 쓸 줄 몰라 말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내가 그걸 노트에 받아 적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제는 아이들이 공책에 써 놓은 글을 대신 블로그에 옮겨 적는다. 머지않아 아이들은 스스로 블로그에 글을 쓸 것이다. 기록도 독립의 시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찡하다. 또 다른 차원의 기록을 통하여 아이들과 내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