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배동 리틀아메리카를 추억하며

2000년도로의 회귀

by Davca

2025.05.20.Tue

오후 4시 8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부터 온 카카오 통화.



내 인생에서 좋았던 기억만으로 남아있는 시절에 머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어떤 의미로 승화되어 지금껏 남아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 분이 그러했다. 사실 즐거움이란 것은 어느 때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단편적이고 배설적인 즐거움을 누리던 때는 그리 많은 기억의 공간을 차지하진 않는다.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의 중심에 좋은 사람이 있고, 그들과 나눈 대화와 더불어 함께한 시간이 풍요로운 마음으로 채워져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 나이 스물두 해. 나보다 열 살이 많았던 이분은 내게 지금까지 좋은 기억을 함께 나눈 사이이다.




마흔 중반 무렵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젠 현지에서 자리를 잡으셨고, 두 딸도 잘 자랐다. 첫째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는 올해 고3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난 만큼, 이 분의 삶이 이뤄낸 값진 성취가 돋보인다.


스물아홉 해에 레스토랑 펍을 시작하셨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의 가게에서 난 알바가 되었다. 꽤 오랜 시간 알바를 이어갔다. 알바이기보다 직원에 가까울 정도로, 홀서빙에서 출발하여 주방 보조, 카운터, 정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할 수 있는 정도의 직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른 초반에 열명 정도의 알바와 가게관리, 납품 거래처 관리 등을 온전히 홀로 진행하신 사장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서른둘 엔 난 그저 은행원이었다. 주어진 일을 하고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개인의 성장과 부의 증대를 위해 더 큰 생각을 할 준비가,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게 오래전부터 각인된 직장인으로서의 DNA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교육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사장님은 특별한 존재였다. 때론 진지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늘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가벼워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사람, 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고 내 삶의 큰 부분을 그분이 차지하고 있음이 감사했다. 학교라는 범주 밖에서 만난 귀한 인연이었다.




테이프를 돌려보면 생각나는 몇 장면들이 있다.


아르바이트하러 가게에 들어왔을 때 2층에서 창밖으로 비 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사장님의 모습, 베이지색 폴로 모자를 거꾸로 쓰시고 바랜 주황색 반팔티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 그리고 편한 슬립온. 걸어올 때 특유의 통나무 바닥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911 테러가 터지던 날 생방으로 속보가 나올 때 우리는 주방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역사의 한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았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엮여 있었다. 지금까지 2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알바와 가게 사장과의 연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면, 당신은 정말 그 누구보다 가치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고등학교 동창을 제외하고 이런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분은 사장님이 유일하다. 오랜만의 통화가 반가웠다. 그런데.



지난주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오셨었다고. 아니 근데 왜 연락을 안 하신 거냐고 대뜸 물었다. 매일 같이 연락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연락하기가 싫었다고 하셨다. 순간 서운하고 죄송했다. 어떤 누군, 카톡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는데 난 그럴 센스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이 미안함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외조부, 외조모 그리고 조부의 장례식에 사장님은 모두 걸음 해주셨다. 심지어 인도네이사에서 나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어린 딸들을 데리고 한국에 오셨다. 그런데 난.

이런 상황에서도 난 또 최근의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마흔넷,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지금의 나의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사장님은 당신이 자카르타로 떠날 무렵이 마흔 중반이었다는 얘길 해주셨다. 지금이 그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들 때라고 말이다. 뭐 특별한 말도 아닌데,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이 말이 위로가 된다. 정말 위로가 된다. 직장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하게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만의 비즈니스를 빠르게 시작하고 있지도 않은 나 자신이 답답했던 하루하루였는데 잠시 숨이 쉬어졌다. 최근 지난 시간들, 그러니까 매년 있었던 굵직한 기억들 위주로 개인의 서사를 정리 중이다. 이것으로 무엇이 될까마는, 이 기록들을 기반으로 수정 또 수정을 거듭해 간다면 내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체에 걸러지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또 거기에서 운이 따른다면,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삶에도 쌀 한 톨만큼의 크기라도 의미를 주는 얘깃거리들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정리의 시간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며 즐길 수 있다면, 그에 준하는 결과 또한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즐거움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시작은 인연에 기인하고 있었다. 손님과 사장으로 만나 알바와 사장의 관계가 되었고 이제 인생의 선배와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후배가 되었다. 마흔넷 그리고 쉰넷 그렇게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렀다. 그때 즐거웠던 이야기들을 남아있는 사진과 기억을 토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좋은 기억으로 왜곡된다 하더라도 내 인생의 한 장면들을 따듯하게 남겨보고 싶다. 그 즐거움에 머무는 것이 오늘의 즐거움과 내일의 즐거움으로 이어질 것을 이제는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맹목적 치열함과 열심히 하는 것만이 제일의 가치라 여긴 내 삶에 때늦은 브레이크를 작동시켰으니, 이 시간의 의미에 지난 시간의 행복을 더해보려 한다.


골프를 치지 않는 내게, 2박 3일 자카르타로 공을 치러 오라고 하신다.

여기 오는 사람들 모두 잘 치는 사람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클럽을 잡아본 게 2012년 실내연습장에서 강습을 받을 무렵이었다. 내가 그만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였다. 이때는 선택의 기준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데, 왜 어느 순간부터 억지 선택과 결정을 애써 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나이가 듦에 타협에 익숙해지고 합리화에 능해졌다. 이십여 년 전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때론 가볍게, 가끔은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시던 그가 그리운 밤이다.




*최근에 검색해 보니 리틀 아메리카라는 샌드위치 가게만 나오더군요.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지난 시간들의 감사함을 어딘가에 정리해두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좋은 인연들도 많이 그립기도 하고요. 당시의 사진이나 기록들이 발견되면 다시 한번 글을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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