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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Sep 06. 2023

고백의 순간

장세정의 동시 「고백」(『모든 순간이 별』(상상, 2022))

고백

        장세진


이 놀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

산길을 찍고

눈 위에 찍고

새로 바른 시멘트엔 꼭 찍고

사막에도 남기고

행글라이더 타고 하늘에도 꾹

눈 감고 코 막고 바다에도 찍어

마침내 달에도 사뿐

그래, 바로 발자국 찍기 놀이야

마음에도 발자국을 남길 수 있대

난 어떤 지우개로도 지우지 못할

초강력 발자국을 네 마음에 찍기로 했어

바로 지금

있잖아, 연두야!



 고백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고백의 핵심 조건은 아니다. 고백이란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이다. 마음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상태가 고백의 필요조건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꺼내버리고 싶은데, 결과가 불러올 파장이 무서워 망설이는 마음이 고백의 출발이다.

 고백은 망설임에서 출발한다. 말을 해야할지, 하지 않아야 할지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다 끝내 내뱉어버리고야 마는 말들이 고백의 언어이다. 그러니 고백은 순간의 언어다. 끝까지 망설이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 망설임 자체를 종결하는 순간이 바로 고백이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어 터져버리게 되는 순간이 고백이다. 잘못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순간이 그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그러하다. 잘못이든, 사랑이든 그것을 고백하는 순간이 감동적인 이유는 머뭇거리는 시간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핵심은 "초강력 발자국을/ 네 마음에 찍기로 했어/ 바로 지금/ 있잖아, 연두야!"이다. 17행의 시에서 마지막 4행이 내용의 전부를 담고 있다면, 앞의 13행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화자는「고백」을 놀이라고 한 뒤, 이를 10행에 걸쳐 설명한다. 길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고백을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백을 하기 전 주저함과 망설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같은 제목의 노래가 떠오른다. "달이 차고 내 마음도 차고 이대로 담아두기엔 너무 안타까워 너를 향해 가는데 달은 내게 오라 손짓하고 귓속에 얘길하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야." 나의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터져버리는 순간, 바로 그 때가 고백의 미학이다. 망설이고 주저했던 시간의 압력만큼 강렬한 에너지로 추동되는 말들이 바로 고백의 본질이다. 그러니 어떤 마음은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저절로 폭파해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까지 기다리다보면, 그 마음은 저절로 고백되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진정성 있는 고백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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