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의 동시집 『오늘도 거북이는 지각이다』(문학동네, 2018)
피아노 3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피아노를 친다고 한다
친다는 것은 때린다는 것
피아노 속을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피아노는 때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말하자면 타악기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출 때마다
수많은 해머들이 소리핀을 두들긴다
저렇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매를 맞으면
어이구 아야 어이구 나 죽네 하는 게
보통인데
매를 맞는데
이쁘게도 운다
딩동댕동
딩딩동
행과 행의 연결이 긴밀하다.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피아노 친다고 하며, 친다는 것은 때린다는 것이니, 피아노는 때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즉, 타악기다. 한 행(行), 한 행(行), 그러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시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몰랐던 곳에 도착해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매를 맞는데 이쁘게 울 수 있을까?
물론, “매를 맞는데/ 이쁘게도 운다”는 말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를 맞는데도 불구하고 이쁘게 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노래하는 것이다. 가령, 커다란 바위를 영원히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그것과 닮은 인간의 숙명에 대한 비유이다. 매를 맞는 일은 폭력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마주해야 하는 존재론적 고통이다. 그렇기에, 맞아야만 소리를 내는, 고통 속에서만 존재 이유를 실현할 수 있는 피아노는 인간과 닮은 점이 있다. 피아노가 살아내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매를 맞는데도/ 이쁘게도 운다”는 말 앞에서 고개를 갸웃한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시를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을 배우는 과정에 있다. 시는 비유의 언어이지만, 어린이에게 시는 직접적인 언어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다. 이안의 말처럼 윤제림의 동시는 “무기교의 시”이지만, “기교가 없는게 아니다. 기교를 뛰어넘었기에 다만 담백하게, 기교가 없는 듯 보일 뿐이다.” 기교의 없음을 선택하면서 잃는 것은 언어의 특별함일 것이고, 얻은 것은 언어의 범상함일 것이다. 보통의 것과 구별되지 않은 언어이기에 보다 직설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피아노3」는 결국 이런 말이 되는 것 아닐까. '보통은 매를 맞으면 앓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피아노는 매를 맞으면서 이쁘게 운다.' 이 말을 보이는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있지 않을까. 시인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물론, 어린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숨겨진 의미가 아닌 드러난 말을 세심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의미가 직접 드러나지 않게 숨기는 방법은 문학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는 어린이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 이전의 언어가 섬세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