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 아침을 먹기도 전에 하늘과 구름을 보다니. 그리고 아침을 먹고 나가서 하늘과 구름을 다시 봤다니. 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여유로운 어린이인가.
나는 핸드폰 알람으로 눈을 뜨고, 오늘 날씨 확인하고, 꼭 봐야하는 뉴스는 없는지 검색을 조금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어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기도 한다. 비단 나만의 습관은 아닐 것이다. 창밖의 태양과 구름보다, 핸드폰 화면 속 태양과 구름 그림을 먼저 보는 일이 당연한 일이 되지는 않았을까.
화자는 뭉게구름을 뭉게구름 "덩이"로 볼 수 있다. 뭉게구름을 하나의 덩이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뭉게구름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만큼 뭉게구름에 오래 시선을 두어야한다. 아마 화자는 구름을 꽤 오랜 시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하고 돌아온 하늘에 뭉게구름이 사라졌다. 이 때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아랫집 몽실이"이다. 우리집 몽실이도 아니고, 할머니집 몽실이도 아니다. 아랫집 몽실이다. 아랫집 몽실이는 "먹성 좋은 늙은 개"이다. 게다가 어린이는 아직 "몽실이만큼 윤이 나게 반짝반짝 비운 밥그릇"을 본 적이 없단다. 아랫집 강아지가 싹싹 비운 밥그릇을 떠올릴 수 있는 마음이 새삼스럽다.
아랫집 강아지를 떠올리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우리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여기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웃에 대해, 마을에 대해 구석구석 아는 일은 점점 일어나지 않는 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인 아이는 구름이 떠나간 텅 빈 하늘을 보며 먹성 좋은 아랫집 강아지를 떠올린다.마음 속에 아랫집 강아지를 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달리말해, 아이는 이웃을 품고 있다. 넓게는 마을을 품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볼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 지금의 아이들은 마음에 깊고 단단한 마을을 품고 있을까. 요즘 아이들은, 작은 창으로 새롭고 다양한 것을 보게된 아이들은 세상을 꼼꼼하게 들여다 보고 있을까. 그럴 수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