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를 모르면 재화된 서사는 무너진다
<어느 날 호랑이가 찾아왔습니다>『네모 돼지』, 김태호, 창비, 2015
1. 들어가며
설화는 민중의 삶과 목소리를 담고 있다. 설화는 민중이 공유하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보편성이 확보된 이야기다. 보편성은 작가들이 설화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보편적인 것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욕망은 예술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
설화의 화소는 대중에게 익숙하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이 문학의 주된 방법이라고 한다면, 설화의 화소를 비틀어 만든 이야기는 문학적일 수 있다. 그러나 표현된 것 이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보다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설화를 개작하는 의도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 빈 이야기가 되기 쉽다.
김환희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하 <해와 달>)를 그린 그림책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어린이를 위해 ‘다시 쓰기’한 <해와 달>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일까?”재화된 그림책에 원형 서사의 핵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여기서 원형 서사의 핵심은 오누이의 주체성이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김환희의 가장 정확한 진단은 다음과 같다. “작가가 <해와 달>에 대해서 충분히 공부하지 않고, 체험과 상상력에 의존해 글을 썼기 때문인 것 같다.”
설화에 담긴 민중의 삶과 목소리, 이면에 깔린 보편적인 문제 의식과 정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옛이야기를 ‘다시 쓰기’한 동화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원형 설화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가 바탕이 되었을 때, 성공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설화를 다시 쓰는 일은 이미 알려 진 설화의 ‘핵심 가치’를 재구성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화는 전체를 다시 쓰지 않고, 몇 가지 화소를 활용하여 개작할 수 있다. 설화의 화소는 전체의 부분일 때 의미가 있다. 화소가 뿌리 내려진 토양은 원형 설화이다. 화소를 활용할 때, 뿌리에 붙은 토양을 함께 옮겨 심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오래 지속될 것이다. 여기, 설화의 핵심 가치를 잃지 않고 재화된 이야기가 있다. 김태호의 <어느 날 호랑이가 찾아왔습니다>(이하 <어느 날>)(『네모 돼지』, 창비, 2015)이다.
2. 오누이에서 엄마로
<해와 달>은 다양한 각편이 존재한다. 각편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서사 단락은 오누이가 호랑이를 여러 가지 꾀로 따돌리는 내용이다. <해와 달>의 중심 인물은 오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 서사의 핵심은 오누이가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의 중심 인물은 엄마다. 작품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엄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르르릉.
호랑이였다.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틀림없는 호랑이였다.
(중략)
“떡 하나 얻어먹으러 왔지!”
호랑이의 대사로 <해와 달>을 떠올릴 수 있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엄마가 호랑이를 마주하는 공간이 “현관문 앞”이라는 사실이다. <해와 달>에서 집은 남매가 호랑이를 만나는 공간이다. 그러나 <어느 날>에서는 엄마가 호랑이를 마주한다. <해와 달>에서 오누이가 호랑이를 마주하는 공간이 엄마가 호랑이를 만나는 공간이 되었다.
설화의 핵심 서사가 오누이의 주체적인 문제 해결이라고 본다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은 ‘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집’에서 엄마가 호랑이를 마주하는 것은 이야기가 엄마 중심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설화 속 ‘집’의 상징성을 잃지 않으며, 중심 인물이 성공적으로 전환되었다.
<해와 달>에서 오누이는 호랑이의 목소리를 의심한다. 털이 듬성한 손을 보고 어머니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호랑이는 집 안에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날>의 호랑이는 쉽게 들어간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해와 달>에서 호랑이와 대면은 곧 죽음이다. 알다시피,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어머니는 잡아먹힌다. 또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각편 중 호랑이를 의심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준 오누이는 모두 잡아먹힌다. 설화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호랑이와 대면한 엄마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심리적 죽음이다. 엄마의 자아와 인격은 이미 실존적 가치를 상실하였다. 엄마는 왜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을까. 다음 장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엄마는 종이 상자 안에 있는 떡을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어제 자신의 생일을 위해 떡을 준비했지만 상자를 뜯지도 못하고 그대로 둔 상태였다.
엄마가 생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먹으려고 준비했던 떡들은 몇 년째 냉장고 속에 얼어 있었다.
떡을 내놓으라고 하는 호랑이에게 엄마는 떡을 숨기려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는 식탁에 있는 떡 뿐 아니라, 몇 년간 얼어 있는 떡을 모두 뺏는다. 엄마는 자신의 생일을 위해 손수 떡을 준비한다. 어제 준비한 떡은 상자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뜯지 않은 떡이 쌓인 지 몇 해가 흘렀다.
엄마의 심리적 죽음의 원인은 명백하다. 가족의 무관심이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주부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가족은 엄마에게 관심이 없다. 가사 노동의 불공정한 분배와 가정에서 엄마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꾸준히 지적 되어왔다. 작가는 익숙한 주제를 익숙한 설화 모티프를 활용하여, 새롭게 말하고 있다. 수천 년 인류의 역사에서 문학의 주제는 더 이상 특별하기 어렵다.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해와 달>의 핵심 서사는 오누이의 주체적인 문제 해결 과정이다. 호랑이에게 문을 함부로 열어주지 않고, 손을 보여달라 하고, 똥이 마렵다고 꾀를 내는 등 호랑이에게 맞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오누이의 모습이 <해와 달>의 중점이다. 그러나 오누이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엄마로부터 독립이다. <해와 달>에서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다. 엄마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오누이의 독립이 그들을 스스로 행동하게 만든다.
<어느 날>에서 엄마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영혼의 병은 외상이 없다. 관심이 없다면 알아차릴 수 없다. <어느 날>의 남매, 남편은 호랑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작가는 설화 모티프를 끈질기게 활용하며, 엄마가 심리적 죽음에 이른 상황을 보여준다.
3. 엄마가 호랑이를 만난 이유
떡을 모조리 먹은 호랑이는 엄마의 잠옷을 입고 엄마로 변신한다. 이어서 내기를 제안한다. “내일 아침까지 가족들이 내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면, 그 순간 나는 떠나 주지.”라는 제안이다. 엄마는 받아들인다. 엄마는 한 가지 꾀를 낸다. 호랑이 머리에 스타킹, 허리에 넥타이를 매어 준다. 엄마의 제안은 옛이야기에 담긴 해학과 익살의 묘를 살린다. 동시에, 가족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극을 강화한다.
설화의 특성 중 하나는 구조의 단순성이다. <어느 날>의 구조 또한 단순하다. 내기 시작 이후, 아들, 딸, 남편이 차례로 집으로 들어온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다시 남편, 딸, 아들이 차례로 집을 나선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구조가 단순하기에 서사가 명료하다. 엄마의 심리적 고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설화의 특성을 고려하여 재화하였다. 혹, 구조의 단순성이 동화의 장르적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네모 돼지』에 실린 작품 전부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어느 날>이 보여주는 단순함의 미학은 명백히 의도적이다.
<해와 달>에서 오누이는 집에 들어오려는 호랑이를 의심한다. 목소리를 듣고 의심하여 손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로 도망갈 수 있었다. 오누이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매와 남편은 호랑이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술에 잔뜩 취한 아빠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에 쓰러졌다. 호랑이는 한 손으로 아빠를 들어 옆구리에 끼고 안방으로 옮겼다. 침대에 던져진 아빠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렸다.
돈을 가지고 나와 딸에게 내밀었다. 팔뚝에 털이 튀어나와 있었지만 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그런 걸 팔에 끼고 있으니까 음식에 털이 들어가잖아.”
아들은 얼굴을 찌뿌리며 그대로 집을 나섰다.
앞서 말했듯, 엄마는 호랑이를 만난 순간 이미 죽은 것이다. 설화의 맥락에서 엄마의 죽음은 오누이의 독립을 상징한다. 오누이가 호랑이를 의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의 죽음으류 표상되는 독립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였기에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은 엄마의 죽음이 남매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엄마 중심 서사이기 때문이다.
<해와 달>은 오누이 중심이다. <어느 날>은 엄마 중심이다. 오누이에서 엄마로 초점이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설화의 핵심 논리도 뒤집힌다. 엄마의 죽음은 남매의 독립이 아니다. 남매의 의존이 엄마의 죽음을 야기한다.
4. 나오며
내기에서 진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다. 엄마는 방으로 피한다. 5층 베란다에서 나가기 위해 비상용 밧줄을 사용한다. <해와 달>은 오누이를 위해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준다. 밧줄은 희망이자 구원이다. 엄마는 스스로 밧줄을 내린다.
<해와 달>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간다. <어느 날> 엄마는 땅으로 내려간다. 승천과 추락이다. 설화의 논리가 뒤집힌 것처럼, <해와 달>과 <어느 날>은 반대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리고 떨어진 엄마 옆에는 분홍색 꿀떡이 있다. 다음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덜커덩 삐걱삐걱.
바람도 없는데 쓰레기통이 혼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킁킁! 어디서 또 맛있는 찰떡, 꿀떡 냄새가 나는 거지?”
쓰레기통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호랑이가 ‘엄마’와 같은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암시다. ‘남매’와 ‘남편’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여성의 가사 노동과 소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현실적 진단이다. 결말의 효과와 의도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러나 문학은 보편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찰떡, 꿀떡은 ‘엄마’의 고립과 소외를 상징하는 개인적 상징물이다. 소외된 엄마는 있을 것 같지만, 그곳에서 찰떡, 꿀떡 냄새가 날 것 같지는 않다. 호랑이의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오히려 여운이 있는 결말이 되었으리라.
결말의 아쉬움이 있지만, <어느 날>은 기초가 탄탄한 서사다. 설화의 핵심 가치와 구조가 작품을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화소가 지닌 의미가 보존된 채 작품 속에 녹아들어있다. 설화 분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재화된 이야기는 무너지고 만다. 원형 설화가 반사판으로 존재 할 수 있을 때,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더 빛난다. 설화 화소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려면, 설화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