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주세요》(임수현, 문학동네, 2023)
임수현은 《외톨이 왕》(문학동네, 2019)에서 독창적인 상상의 세계와 환상의 언어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상상은 내면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특히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었다. 그의 외로움은 주로 가족으로부터 소외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존재로 할머니가 등장한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는 《외톨이 왕》에 등장한 할머니 이야기의 확장판이다. 할머니를 소개하는 시이자, 서시인 <눈먼 할머니>를 보도록 하자.
세 살 때
나뭇가지가 눈을 찔러
눈이 먼 할머니
눈이 멀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되었고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게 되었어요
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죽어가던 토끼를 살리고
뱀의 똬리를 풀어 줬어요
사는 것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내게 끊임없이 들려줬어요
나는 담쟁이가 되어
할머니 이야기를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벽을 기어올랐어요
눈먼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눈 밝은 이야기로 돌아와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줬거든요
내 머리를 땋아 주고
콩에서 콩깍지를 골라내고
이불을 지었던 할머니
내가 부르면
저 먼 보름달 뒤에서 손을 흔들어요
-<눈먼 할머니> 전문
“눈먼 할머니”는 “눈이 멀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되었고/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게 되었다.” 시각의 상실은 새로운 감각이 발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새로운 감각을 통해 “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죽어가던 토끼를 살리고/ 뱀의 똬리를 풀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김제곤은 “눈먼 할머니”를 “시인을 시로 이끈 일종의 대무(大巫)”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은 “눈먼 할머니”가 가르쳐 준 시 쓰기 방법이다. “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자신만의 감각으로 타자와 소통하고), “죽어가던 토끼를 살리고”(생명을 불어넣고), “뱀의 똬리를 풀어”주는(대상을 해석하는 일)은 시인의 시 쓰기 방법, 즉, 시론(詩論)이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시는 인생의 육성”일 수 있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그의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의 시론(詩論)은 언제나 그의 인생론(人生論)이다. 결국, <눈먼 할머니>가 가르쳐 준 것은 시 쓰는 방법이자,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는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39편의 시가 실렸다. 할머니가 등장하는 시는 19편이다. 시인은 할머니를 자주 이야기한다. 다만, 조금 특별하게 추억한다.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철컥철컥……
할머니! 뭐 하세요?
웃음 많은 네 아빠는
씨실
힘센 장사 네 엄마는
날실
번갈아 꿰어
우리 몽글이 짜고 있지
까치가 씨실을 까마귀가 날실을 물어다 주는
은하수 너머
철컥철컥……
할머니! 할머니!
노란 웃음
반짝이는 보조개
동그란 눈을 짜 주세요, 네?
그래그래
걱정 말고 어서 자렴
철컥철컥……
철컥철컥……
-<베 짜는 나라> 전문
<베 짜는 나라>는 ‘나는 누구인가?’ 이전에,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탄생 이전의 과거,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그 시간은 경험하거나 지각(知覺)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상상만으로 감각 할 수 있다.
자아의 기원을 적극적으로 상상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아와 세상의 연결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몽글이”는 아빠(씨실)와 엄마(날실)가 “번갈아 꿰어” 짜인 존재다. “씨실”과 “날실”은 오작교 설화의 “까치”와 “까마귀”가 물어다 준 것이다. 결국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나의 몸은 엄마와 아빠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다.’
특별하지 않은 전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미지로 상상할 수 있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평범한 메시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임수현의 언어가 환상의 성격을 갖는 것은 현실에서 벗어난 시공간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의 언어를 걷어내면, 현실의 어린이를 향한 애정 어린 메시지가 드러난다.
<베 짜는 나라>의 할머니는 “눈먼 할머니”임과 동시에 아이의 탄생을 점지하는 삼신할미다. 시는 한 편이 독립된 세계이지만, 독자는 여러 시를 겹쳐 한 편의 시를 읽는다. 그러니 모든 시의 “눈먼 할머니”는 삼신할미의 신비로움과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는다. 개인적 상징인 “눈먼 할머니”는 삼신할미의 이미지를 부여받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개인적인 추억이나 상상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을까. 시인이 펼쳐 보이는 상상의 세계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을까. 혼자만의 상상 놀이에 머무르지는 않을까?
물려받은 이불을 덮고 자면
앞사람이 꾸던 꿈을 이어서 꾸게 된대
할머니는
내게 하얀 솜이불을 덮어 주었어
빨갛고 노란 실로 수놓은
작약꽃이 벙근 이불이었지
나는 노랑나비가 되어
할머니가 꾸던 꿈을 이어
훨훨 작약꽃밭 위를 날아다녔어
그 이불만 덮으면
새근새근 잘도 자더래
두껍고 무거워
잠이 아주 가벼웠거든
-<아주 오래된 꿈>
정재승 박사가 어느 매체에서 ‘상상(想像)’의 어원을 설명한 바 있다. 인도를 탐방하고 온 어떤 중국 사람이 자국의 사람들에게 코끼리의 존재를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코끼리 뼈를 밀반입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코끼리 뼈를 통해서 코끼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상상(想像)의 어원이다.
상상은 ‘코끼리 뼈’와 같은 구체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할머니가 덮어주신 “하얀 솜이불”은 화자를 상상 세계로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화자는 1연에서 상상의 개연성을 확보한 뒤, “하얀 솜이불”을 타고, “노랑나비가 되어” “훨훨 작약꽃밭 위를 날아다”닐 수 있다.
임수현의 동시가 ‘몽상’에 머무르지 않고 ‘상상’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구체물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도깨비 신발>, <복주머니 귀신>, <눈사람은 긴 팔을 남기고>, <은비녀>에 나타난 물건이 ‘코끼리 뼈’와 같다. 상상의 구체적 소품이 ‘코끼리 뼈’라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는 ‘코끼리’이다.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코끼리’는 무엇일까. 환상의 언어를 통해 구축하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는 어떤 공간일까. 시인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아본다.
안녕,
나는 “외톨이야”하고 부르면 외톨이가 되는 나라의 수문장이야.
다시 말하자면 문지기지.
(…)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주황빛으로 흩어지는 걸
함께 바라보지 않을래?
자, 힘껏 외로워할 친구들은 지금 바로 모여 봐.
노란 깃발 흔드는 민들레가 기다리고 있을거야.
-《외톨이 왕》, 시인의 말 부분
시인은 “외톨이 나라의 수문장”을 자처하며 “힘껏 외로워할 친구들”을 초대한다. 그곳은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주황빛으로 흩어지는” 곳이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 들어가는 방법은 “눈을 감”고 가만히 ‘내 안의 외로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임수현은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물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낚는 법을 알려주듯, 어린이에게 ‘내 안의 나’를 만나는 방법을 보여주고 안내한다. 외로움과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법을 어린이에게 알려준다. 이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이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까마귀야, 까마귀야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야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니?
나는 주머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보여 줬지
머리를 집어넣어 깃털을 고르던 까마귀는
“까마귀는 까마귀, 까아악 까악.”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날아가 버렸어
까치야, 까치야
이 소식 저 소식 전해 듣는 까치야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니?
굴참나무 꼭대기
까치에게도 지도를 보여줬어
“나도 딱 한 번 가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염소야, 염소야
까만 똥을 누는 염소야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니?
노루야, 노루야
뿔을 키우는 노루야
여기가 어딘지 좀 알려 줄래?
누구라도 베 짜는 나라로 어떻게 가는지
좀 알려 주겠니?
-<할머니 사는 곳> 전문
“까마귀”와 “까치”는 할머니에게 실을 물어다 준 존재이다. 그런 까치와 까마귀조차 “할머니 사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염소”와 “노루”는 오죽할까. “나”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베 짜는 나라로 어떻게 가는지/ 좀 알려 주겠니?”라는 물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나”는 “베 짜는 나라”로 가는 “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어디인지 알 것 같지만, 닿을 수 없는 곳이다. “베 짜는 나라”는 나의 기원이자,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이다. 아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와 하나였던 시간을 그리워한다. 완벽하게 보호받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언젠가 인정하게 되지만,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외로움으로 남는다.
<할머니 사는 곳>의 화자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답하지 못해 애가 탄다. 실존을 탐구하는 질문은 누구나 마주하는 법이다. 주로 청소년기에 마주하는 질문이지만, 연령을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패배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라면 더욱 그렇다.
<할머니 사는 곳>은 실존적 질문 앞에서 방황하는 주체를 그리고 있다. 상황은 삶의 혼란과 무기력이지만, 정서는 편안하다. 혼란과 좌절을 상황으로 보여주는 동시가 아닌, 혼란과 좌절을 직접 느끼게 하는 동시는 어린이에게 해로운 일일까? “동시(童詩)에는 고통이 없다”(『불화하는 말들』)는 이성복의 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따끔한 예방 주사 같은, 건강한 고통이 필요할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강에서 주워 온 돌멩이가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우리 집에 산다는 게
내 돌잔치 때 손님들에게 돌렸다는 수건이
아직 우리 집 욕실에 걸려 있다는 게
세발자전거 타고 놀던 내가 학원 차를 타고
너희들 몇 학년이니? 언니처럼 군다는 게
달빛이 백만 년 동안 끝도 없이 풀려 나온다는 게
파도가 쉬지 않고 달을 민다는 게
환상적이지 않니
나도 언젠가 우리 할머니 같은
깔깔깔 할머니가 된다는 게
-<환상적이지 않니> 전문
“할아버지”는 사라졌지만, “돌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돌잔치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컸는데, “수건”은 여전히 “욕실에 걸려 있다.”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현재의 모습은 다르다. “달빛”은 “백만 년 동안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고, 달이 존재하는 한 “파도”는 “쉬지 않고 달을 민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어린이는 쉼 없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발자전거 타고 놀던” 나는 자라서 “학원 차를 타고” “언니처럼 군다.” 어린이는 변화한다는 점에서 “돌멩이”, “달빛”, “파도”와 다르다. “수건”은 닳고 헤지는 존재이기에, 어린이와 다르다. 성장한다는 것, 자란다는 것은 현실의 법칙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일일지 모른다.
<환상적이지 않니>는 동시집의 마지막 작품이다. 첫 작품인 <베 짜는 곳>의 할머니는 탄생을 점지하였고, <환상적이지 않니>의 할머니는 “나”의 미래 모습이다. 할머니는 나를 만들었고, 나는 자라서 할머니가 된다.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은 대구를 이룬다. 할머니-나-할머니-나-… 관계는 사슬처럼 이어져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탄생 이전의 과거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결국 시간의 순환 구조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시간의 순환 속에서 안전감을 획득하여, 세상과 단절감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를 통해 외로움과 쓸쓸함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동시집은 표제작을 제목으로 삼거나, 작품 속 한 구절을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는 표제작도 아니고, 작품 속 구절도 아니다. <베 짜는 나라>의 한 구절,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에서 “오늘은”을 추가하였다. “오늘은”을 왜 붙였을까. 그 전에, 왜 “노란” 웃음일까.
임수현에게 노랑은 희망이자 치유의 색이다. 눈을 감고 들여다본 내 안에는 “민들레”(<모서리 아이>)가 있다. 민들레는 작고 여리지만 잘 죽지 않는다. 내 안에 민들레가 피어있다는 건, 좌절에 굴복하지 않는 희망을 의미한다. 결국, “노란 웃음”은 희망이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는, 어제는 노란 웃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희망이 없는 외로운 과거가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은 노란 웃음일 거라는 희망과 의지가 보인다. ‘오늘은 노란 웃음’이니 내일은 당연히, 노란 웃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의 나에게 내일은 언제나 오늘이 되기 마련이니까.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은 내일의 희망을 말한다. 외로움, 쓸쓸함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외롭고 쓸쓸해도 괜찮다고, 내일은 외로워도 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외롭고 쓸쓸한 어린이, 희망 없는 어제를 사는 어린이에게 필요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