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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May 01. 2024

20년 전 출판된 동화를 읽었습니다.

남찬숙 장편동화 『괴상한 녀석』(창비, 2000)

 남찬숙 작가님의 장편동화 『괴상한 녀석』(창비, 2000)을 읽었습니다. 2000년에 출판된 동화입니다. 이 동화는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살펴보면 부당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말과 행동이 많습니다. 지나간 관습으로 취급하고 쉽게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작가의 비판의식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잘못으로 느껴지는 부분을 당시에는 감각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시대의 과오 혹은 잘못된 부분이 그대로 반영된 동화를 읽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낡은 동화로 치부하거나, 현재를 보는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되는 걸까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작가님께 죄송하지만, 이 동화의 생명은 끝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기에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속한 사회의 구조가 지금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동화가 어린이에게 더 이상 감동이나 가르침을 주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와 비교하여 실제 우리의 삶에 얼마나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당시 사회의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동화가 아니라, 비판적 성찰 없이 폭력적인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수용한 동화는 지금-여기의 어린이에게 어떤 효용이 있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성차별적인 요소가 담긴 말과 행동이 눈에 띕니다. 윤아는 경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야, 넌 남자애가 그렇게 쩨쩨하니?" 지금 보면 경악할 말입니다. 특히 어린이가 읽는 동화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고, 고정적인 성역할을 부여하는 편견이 담긴 말은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찬이의 가족을 그리는 모습에서도 성차별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대부분의 결정권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빠의 표정이 몹시 무서워졌다. 엄마도 조금 겁이 나는 것 같았다. 아빠가 보통 때는 엄마 말을 다 들어주는 것 같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무서운 얼굴이 되면 엄마도 꼼짝하지 못했다."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 권력의 중심에 남성이 있는 가정은 이제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에 성차별이나 남성중심의 가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만연하고, 여전히 극복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동화에서는 더 이상 이렇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동화가 아닌 이상,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정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보통이고, 그렇게 하는 일이 어린이를 위한 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동화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으로 그려져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른은 바람직한 사회를 어린이에게 지속적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모습도 지금과 많이 다릅니다. 교무실과 계단을 청소하는 어린이의 모습,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교사의 전문적 권위 등이 현재와 대비됩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 많은 점에서 대비됩니다. 작품에서 경태와 찬이, 석이는 몸 싸움을 합니다. 경태는 석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고, 석이는 경태를 때렸습니다. 경태는 이가 부러지기까지 합니다. 지금 학교폭력예방법에 이 상황을 대입해본다면, 명백한 학교 폭력입니다. 아마도 석이는 교육청에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내 봉사 혹은 사회 봉사를 하거나 심한 경우 전학을 가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경태와 석이의 싸움은 서로 잘못이 있습니다. 경태는 찬이를 모함하였고, 석이는 찬이를 돕기 위해서라고 하여도 경태에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가 부러진 경태 보호자가 찬이와 석이를 가해자로 신고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잘못이 있기 때문에, 석이와 찬이 보호자도 맞폭을 신청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이를 2건의 학교폭력 사안으로 접수하고, 사안을 조사하고, 양측의 의견을 수용하여 심의를 하게 됩니다. 학교에서는 조치나 처분을 내릴 수 없기에 교육청으로 이관 됩니다. 지역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이 일로 최소 한 달 정도는 두 학생, 두 학생의 보호자는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품에서는 학교에서 교사의 중재로, 아이들의 사과를 통해 미진하지만 화해의 물꼬를 틉니다. 중요한 것은 제 3자의 개입 없이, 당사자 간 사과를 통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학교폭력은 학교, 교사의 중재로 화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중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밀침, 접촉 등으로 시작된 학교폭력 사안은 학부모의 감정 싸움, 법적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교사의 과실 여부를 따지거나 책임을 묻는 일이 많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화해 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정해진 절차를 통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교사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에 그렇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는 보호되어야 하며, 가해자는 잘못을 책임져야 합니다. 가해, 피해가 명확하고 피해 정도가 심각한 학교폭력의 경우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학교, 교사, 사회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폭력으로 접수되는 일부 사건은 학교, 교사의 중재를 통해 화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일만큼 경미합니다. 20년 전에는 학교폭력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다툼이 지금은 학생을 수업에서 7일 간 격리시킬 수 있을만큼 엄청난 잘못으로 인정됩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제재 수위가 강해진다면 학교폭력 예방과 근절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무분별한 학교폭력 신고는 반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이가 경태를 때린 것은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석이는 잘못을 확실하게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태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석이와 다시 친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경태도 찬이를 때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학교는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학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날카롭고, 교사는 위축되어 있습니다. 피해는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과하고, 책임지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석이가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학교는 경태, 석이, 찬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경태는 석이를 용서했을까요. 셋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지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사실 어린이들은 사이가 금방 좋아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어린이는 관계를 회복하는 탄력성이 월등히 뛰어난 것 같기도 합니다.

 2000년대 나온 동화를 읽고 달라진 생활상을 생각하다보니, 학교폭력 이야기로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20년전과 지금 공교육을 바라보는 태도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교사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결과는 결국 공교육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임무의 공백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모쪼록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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