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May 19. 2024

영혼의 독을 품고 길 떠나는 아이

임정자『물이, 길 떠나는 아이』(문학동네, 2005)

 『물이, 길 떠나는 아이』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물이는 하늘나라에서 아기 옷을 짓는 선녀의 실수로 옆구리 솔기가 터진 옷을 받게 됩니다. 터진 옷 솔기로 독이 스며들면 아기는 평생 떠돌며 살아야 합니다. 물이를 점지 받은 아주머니의 첫 말은 "어라, 계집애잖아! 이왕 보내 주실 거면 고추 하나 달아서 보내주시지, 야박하게 계집애가 다 뭐람."이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말은 물이에게 독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방긋방긋 잘 웃는 물이를 키우면서 아주머니의 아쉬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이에게 들어간 독은 구렁이가 되어 나왔습니다. 구렁이는 물이가 있던 물동이에 함께 있었습니다. 아무리 내쫓아도 구렁이는 물이 옆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구렁이는 물이 영혼의 일부이기에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주머니는 나이가 들었고, 남편은 다쳐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이가 밖에서 일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구렁이와 함께 나가면 사람들의 모진 시선을 감당해야 했고, 어딜 가든 쫓겨났습니다. 물이는 더 이상 구렁이와 함께 마을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이는 구렁이를 포기하는 대신, 구렁이와 함께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야기의 제목처럼, "물이, 떠나는 아이"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물이가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계기는 아주머니의 남아선호였습니다. 지금은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좋다, 딸이 좋다는 건 부모가 가질 수 있는 개인적 취향에 불과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이가 살았던 시대에서 본다면, 떠돌아야 하는 물이의 운명은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구분하고 다르게 대하는 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차별의 말은 독이 되어 구렁이로 나왔습니다. 구렁이는 물이에게 독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이 영혼의 일부인 구렁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물이 동무인 구렁이는 사람에게 유해한 행동을 한 적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렁이와 함께 살기를 거부합니다. 영혼의 일부는 곧 타고난 특성이나 취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물이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건이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물이는 마을을 떠나 글을 배우러 갑니다. 그곳에서 "재주 많은 아이"를 만납니다. 그 아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 판단에 의하면"입니다. 아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중시합니다. 저는 이 아이가 이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주 많은 아이와 여러 마을을 떠돌 때 구렁이는 잠시 물이 곁을 떠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사람들과 어울려 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구렁이와 멀어지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구렁이와 떨어지는 일이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요.

 하지만 구렁이는 이내 다시 돌아옵니다. 물이가 재주 많은 아이와 떨어져 눈먼 각시 집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구렁이는 물이 영혼의 일부이고, 물이와 떨어져 살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 돌아올 운명이었습니다. 눈먼 각시에게 바느질을 배웠고, 물이는 다시 쫓겨났습니다. 구렁이와 함께 산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마을은 쥐들이 극성을 부리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에는 언제부터 쥐들이 들끓었고, 이들을 잡아주는 쥐잡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쥐잡이와 쥐들은 둔갑한 도적이었습니다. 물이와 구렁이는 도적을 소탕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흉물인 구렁이를 쫓아내고자 했지만, 쥐의 정체를 밝히고 도적을 쫓아낸 물이와 구렁이를 인정하고 들였습니다. 비로소 구렁이와 동무인 물이를 받아주려는 마을을 찾았지만, 물이는 여정을 계속 한다.

 "아니에요. 저는 가야 해요. 저는 이 곳에 머물 수 있어도 제 동무 구렁이는 오래 머물지 못해요. 그러면 저도 머물지 못하고요."

 물이는 영혼의 일부, 구렁이를 부정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을 인정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일만 팔백 개의 머리카락을 모은 물이는 구렁이의 옷을 짓습니다. 구렁이에게 옷을 입히자 구렁이는 연기가 되어 물이 몸을 한 번 휘감고 사라졌습니다. 구렁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물이는 "가슴 속이 무언가로 꽉 차 있는 것"을 느낍니다. "늘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거리던 까닭 모를 두려움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인정받을 수 없었던 자신의 독, 구렁이를 스스로 인정했기에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구렁이를 물이가 가진 독이자 선천적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습니다. 독이라는 것은 생명에게 피해를 주는 악한 물질이니까요. 그런데, 모든 약은 사실 독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약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불러오는 독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구렁이는 물이에게 해가 될 수도 있지만, 물이의 영혼을 치유하는 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바라보는 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영혼의 독 한 방울은 있기 마련아닐까요. 

작가의 이전글 미래의 기술을 상상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