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시댁에 가면 며칠을 머무르고 왔다. 일요일 아침, 시어머니는 온 가족의 채비를 확인하고 본인도 단장을 하느라 분주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시동생까지 세 남자가 다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뭔가 성에 차지 않으면 다시 호령이 떨어졌고, 명을 받들어 세 남자는 들락날락했다. 다 큰 성인 남자 세 명이 어머니의 말에 오가는 모습이 새롭고 낯설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쪽 아이다! 오른쪽으로 틀어라!”
운전은 시아버지가 하는데 시어머니의 입도 동시에 운전을 했다. 핸들이 시아버지의 손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어머니의 음성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말로 좌지우지 했기에 한 마디 대꾸했다가 열 마디 듣는 게 무서워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현명했던 남자는 시동생이었다. 겉으로는 수긍하는 듯하면서도 말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일을 몰래했다. 그중 누구도 동생만큼 요령은 없어 보였다. 가장 요령이 없는 사람은 하필 내 남편이었다. 남편은 어머니의 말은 대부분 따르려고 했다. 결혼하고 효자가 된다더니 남편은 상(上) 효자가 되어버렸다. 결혼 후 난생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애달픔마저 더해졌다. 어머니와 생각이 다를 때면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편은 결국 짜증을 내며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누군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유독 견디기 힘들어했다. 작은 지적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본인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화를 냈다. 나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 달라거나, 놀이매트를 깔자거나, 먹고 난 뒤에 바로 설거지를 하자는 말에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설거지는 하루를 넘기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2주를 기다려야 했으며, 매트는 부탁한 지 6개월이 지나 겨우 움직였다. 집의 쓰레기는 눈에 안 보인다더니 시댁에 가서는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다녔다. “너는 집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지? OO가 알아서 다 하니 얼마나 좋으니!”라는 어르신들의 말에 나는 종종 할 말을 잃었다. 남편에게 원했던 건, 내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초등학교 5학년, 친했던 친구의 이간질로 왕따가 되어버렸다. 우리 집을 아지트 삼아 놀던 추억이 무색하게, 사춘기를 막 시작한 여자 아이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렸다. 괴롭힘을 주도하던 아이들이 무서워 모든 친구들이 나를 외면했다. 학교에 갈 때면 초라하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지역에서 대규모 초등학교로 꼽히던 학교에서 개교 이래 처음으로 반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올려 보냈다. ‘반이 바뀐다고 끝날 것 같으냐,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게 할 거다.’라는 친구들의 협박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결혼과 동시에 학교를 떠나 버렸고, 우리 반은 젊은 남자 선생님이 맡았다. 무서운 선생님이면 해결될 거라는 단순한 판단이었다. 겨우 학교에 간 날엔 쉬는 시간마다 둘러 싸여 이해할 수 없는 욕설과 추궁을 당했다. 차마 기운이 나질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한 날이면 전화로, 집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창문 아래를 내려다봐도 바라보니 고작 3층 밖에 되지 않았다.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사라지고만 싶었다. 또 학교에 가지 못한 어느 날, 친구들은 내게 따지러 우리 집에 몰려왔다. 소식은 들은 엄마는 집에 오긴 했지만 아이들을 막진 못했다. 내가 해결하고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셔서 간식을 챙겨주고, 친구들이 내 방으로 끌고 가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마마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시댁에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몸에 새겨진 경험이 무의식 중에 되풀이되었다. 남편은 나를 그때로 돌아가게 하고는 떠나버렸다. 가족이 있어도 가족이 없는, 내 편이 없이 남의 편만 가득한 결혼 생활에 내동댕이 쳐진 채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고 피폐해졌다. 숨 쉴 수 없게 하는 무거운 돌덩이가 오래도록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