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놀고 먹는 존재가 공무원인 줄 알지만, 일이 많을 때는 정말 많다. 안 믿어도 어쩔 수 없다. 정말이다. 특히 각종 외부감사, 예결산 등 일이 몰리는 시즌이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다. 요 몇달이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다. 일이 쌓여가는 속도를 내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으니, 이 난국을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을 늘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잠을 줄이고, 그 다음은 쉬는 시간을 줄이다가, 나중에는 밥 시간을 줄인다. 그때 가장 많이 애용하는 메뉴가 김밥이다.
동료에게 부탁해서 김밥 한줄을 받아둔다. 그리고 남들 다 식사한 후 망중한을 즐길 때, 나는 한손으로 김밥 하나 집어 먹으며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들긴다. 한참 하다가 보면 김밥이 있다는 게 생각난다. 그때 하나 더 집어 먹는다. 이런 식으로 간헐적 식사를 하다보면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즈음에는 김밥 한줄을 다 먹게 되고, 1시간 정도 분량의 일이 진행되어 있다.
최근에 3일 정도를 이렇게 밥을 먹었다. 점심 김밥, 저녁 김밥, 다음날 아침 안 먹고 다시 김밥, 이런 식으로 3일 정도 하니 정말 내가 김밥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요즘 나오는 김밥이 다양해서 매번 돌려가며 먹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밥은 김밥. 치즈김밥이 참치김밥 같고, 돈까스김밥도 이제 새롭지 않아 기본김밥으로 갔다가 다시 참치김밥으로 회귀하고. 끝없는 김밥의 뫼비우스 속에서 미각이 마비되어 버릴 것 같은 것도 힘들지만, 제일 힘든 건 심리적 상실감이다. 밥을 먹는 시간에 나는 밥을 때우고 있다는 그 기분이 너무 싫었다.
3일째 되던날,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점심시간에 뛰쳐 나갔다. 오늘은 때려 잡는 한이 있어도 제대로 된 밥을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나갔다. 일이야 쌓이겠지만, 정말 한번 더 먹었다가는 김 알러지가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고른 메뉴가 순두부찌개였다. 뭔가 뜨끈한 국물에 밥 한공기를 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았다. 칼칼한 국물에 밥 한공기를 뚝딱 해치웠고, 점심시간에 이미 오늘 하루를 성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오후 근무를 하던 중, 이상하게 허기가 밀려왔다. 점심도 든든하게 먹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허기였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으니 위가 신나서 열일 했나 싶었으나,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신날 메뉴도 아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허기진 게 당연했다. 든든하게 먹었던 점심은 사실 매운 국물에 조그만 공기 하나 비운 게 전부였다. 순두부에 열량이 많을 리는 없고, 그저 매운 찌개 국물에 밥을 먹은 것이니 사실상 소금국물에 밥 한공기 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김밥이 새로워 보였다. 패스트푸드로 취급하지만 그 안에는 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있다. 밥과 김밥, 단무지, 햄, 우엉, 계란, 그리고 참치나 치즈같은 토핑까지. 펼쳐놓고 먹었다면 충실하다고 할 수도 있는 가짓수이다. 예전에 엄마가 집에서 김밥 만들 때 "간단한 메뉴"라고 했다가 등짝 스매싱을 맞은 기억이 있는데, 괜히 맞은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가 들어가기에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메뉴이고, 엄마의 까다로운 '끼니의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내실이 있는 메뉴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한 후로 김밥을 가지고 '때운다'는 표현은 자제하려고 한다. 김밥에 대한 예우와 무한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만 김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에서도 김밥같은 사람들을 많이 봤다. 가까이 지내며 그 사람의 내면까지 알게되면 그 깊이와 단단함에 놀라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보아온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을 모르는 이들에게 '때우는 김밥'같은 대접을 받는다. 내가 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신한다. 언젠가 알 수 없는 허기짐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이 지녔던 내면의 가치를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그 사람이 곁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