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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안 Mar 10. 2022

코로나 생활치료센터 근무의 기억

작년에 두 번 코로나 생활치료센터 근무를 했었다. 원래는 순번에 따라 파견되어 근무하는데, 누구나 자기 본래 업무가 바쁘다 보니 그중 제일 사정이 나은 사람이 간다. 그러다가 누구도 사정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차례에 가야 된다. 나도 작년에 한창 바쁜 시즌에 갔었는데, 밀린 업무를 보충할 방법이 없어 치료센터 근무가 끝나고 사무실에 와서 야근을 하는 식으로 업무를 했었다. 이것은 체력적으로 힘든 데다가, 파견근무 규정상 적절하지도 않았지만 업무 펑크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생활치료센터가 비교적 평화로운(?) 현장이라는 점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일을 많이 다루다 보니 공무원은 늘 민원을 안고 산다. 대부분 합리적이고 당연히 고민해봐야 하는 요구들이지만, 간혹 권리의식이 너무 투철해서 무리한 요구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민원인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평화가 깨진다. 강도 높은 항의와 함께 투서, 청원, 방문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민원이 쏟아진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공무원이면 1년에 한두번은 겪게 되는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활치료센터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들어오는 분들이 무료로 열흘간 숙식 제공을 받는 데다가, 무엇보다 나의 건강을 국가가 세심하게 챙겨주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서인지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퇴소자의 방에서 감사 인사가 쓰인 메모를 받아들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 메모는 운영실 벽에 붙어 파견 나오는 직원들에게 따뜻한 동기부여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특이한 입소자도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는데, 열흘 동안 TV도 없는 골방에서 지내는 것이 어지간히 지겨웠나 보다. 들어오자마자 반입 가능한 물품을 물어보더니, 바로 다음날 본인이 쓰던 노트북을 들여왔다. 규정상 본인이 쓰던 물건은 반입이 안 된다. 오염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이라 몰랐을 수도 있고,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 지겨울 것도 이해되어 완전 소독 후 넣어주었다. 이번 한번만 되고 다음부터는 절대 안 된다는 주의도 함께 전달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학생 이름으로 커다란 모니터 하나가 들어왔다. 주의를 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러는 것이 괘씸해 전화했더니 자기가 쓰던 게 아니란다. 가족이 쓰던 것도 안 된다고 하니 가족 것도 아니라고 했다. 알고 보니 숙소 안에서 당근마켓을 한 것이었다. 새 물건 사긴 너무 비싸고 쓰던 물건은 안 된다고 하니 중고거래를 한 모양인데, 나는 운영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모니터를 보며 이 친구도, 이걸 여기까지 들고 온 판매자도 모두 크게 될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미안했던 분들도 생각난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야간 근무를 하기 위해 센터로 올라오는데, 정말 비현실적으로 추웠다. 목캔디 먹으면 입안이 추워지는 그 느낌이 폐 속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새벽에 파카와 이불을 두르고 운영실에 있었는데도 한기가 너무 세서 졸 수조차 없었다. 4시쯤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60대 입소자 분이 추워서 잘 수가 없다고 하셨다. 옆에 계신 분도 너무 춥다고 하는 말씀이 들렸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게, 아무리 보일러를 최대로 틀었다 해도 200실이 넘는 큰 숙소라서 집처럼 따뜻하지 않았고, 밖에는 영하 20도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끊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보일러는 이미 최대였고 보일러 관계자를 부른다 한들 그 새벽에 올 리도 없었다. 젊은 나도 힘든데 그분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별 탈 없이 퇴소하셨길 바란다. 


코로나가 이제 정점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오미크론이 최대치를 찍은 후 급격히 감염자가 줄어든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우리도 이제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꼭 그러길 바란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야 겨우 몇 주 나가서 허드렛일 도와드린 게 전부이지만, 거기에 파견 나와 있던 의료반과 외부업체 직원들은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생활치료센터뿐만 아니라, 천막 속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검사 업무 해주셨던 선별진료소 의료진과 공무원들, 하루에도 수십만 건씩 검체 처리를 해주신 검사기관 관계자들, 환자와 직접 접촉하면서 현장을 지켜주신 의사, 간호사 분들의 고생은 짐작이 안 갈 정도다.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주먹만큼의 구멍을 막아주었기에 둑이 터지지 않고 버틴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들 덕분입니다'에 다 담을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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