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소환되는 기억이 있다. 2018년 8월이 이제 막 시작된 그날, 오후 뉴스에 대단한 속보처럼 기상 뉴스가 도배되었다. '39.6℃ 서울 기상 관측 사상 최고 기온'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어느 정도의 더위인지 직접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회사 밖으로 나갔다가 폐부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열기에 화들짝 놀라 다시 쪼르르 사무실로 올라왔었다. "멸망이 다가온 것 같아" 옆 직원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데 사실 날씨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어서 계측 장비에 표시되는 숫자보다 내가 느끼는 감각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2018년의 기록은 나에게 두 번째 기록에 불과하다. 내 인생에서 최악의 무더위는 아직까지 94년으로 남아있다.
94년으로 말할 거 같으면, 지금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폭염 보도의 아이템이 그때 대부분 나왔다 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해였다. 서울도 39℃까지 올라갔던 데다가, 40이라는 숫자를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자가 계란을 대구 시내 아스팔트 위에 떨어뜨리자 금방 허옇게 익어버렸다. 지금은 자주 활용되는 아이템이지만 그때는 처음 보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우리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하던 할아버지도 "내 평생 이런 더위는 처음이다"라며 몸소 역대급임을 증명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학년 순서에 따라 학교 맨 위층에 교실이 있었는데, 냉방기구라고는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4대가 전부였다. 그 선풍기는 냉방기구라는 것이 무색하게 열풍을 뿜어댔다. 에어컨은 교무실에만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태양의 열기가 직접 내리 꽂히는 맨 위층에서, 있으나 마나 한 선풍기 아래 가만히 앉아있기는 거의 고문이었다. 나를 비롯해 모든 학생들은 강아지마냥 수업시간 내내 핵핵거렸고, 선생님은 종이 울리면 도망치듯 교무실로 뛰어 내려갔다. 게다가 교복은 땀 흡수가 잘 안 되는 소재라 애지간한 부위에는 땀띠가 닭살마냥 수북이 쌓여갔다.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다른 엄마들도 아들내미가 그렇게 학교 다니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나 보다. 단축 수업을 해달라는 요구가 학교에 빗발쳤고, 처음에는 더위 때문에 단축수업은 말이 안 된다고 버티던 학교도 방학을 보름 앞두고는 단축 수업에 들어갔다. '신난다'가 아니라 '살았다'가 나오던 순간이었다.
이런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대구 사람들을 만나면 94년도에도 대구에 계셨냐고 꼭 물어본다. 서울에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대구에서 오죽 고생하셨겠냐고 하면, 뭐 그런 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구냐는 듯 시큰둥 한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94년도 대구의 전설을 아세요?"라며 반가움을 내비치기도 한다. 알다마다요, 그때 저도 죽을 뻔 봤어요 하며 고등학교 동창들 마냥 서로 맞장구치다 보면 진짜로 동창이 된 것 같은 유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듣자 하니 올해도 꽤나 덥다고 한다. 그리고 기후위기 때문에 이런 추세가 지속될 거라는 무서운 뉴스가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뉴스도 매년 접하다 보니 나조차도 그러려니 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된 느낌이다. 94년도야 이례적이어서 웃어넘길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이게 일상이 돼버리면 그땐 또 어떻게 살아갈까. 94년은 제발 한 번이면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