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Jan 27. 2021

상냥한 세계를 위하여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있다. SNS에서 본 책 속의 한 문장과 귀여운 표지에 꽂혀 전자책을 샀다. 아직 조금밖에 읽지 않았는데, 페이지를 넘기는 게 아쉬울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어린이, 심지어 내 사촌 동생들과 대화할 때도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쭈뼛대며 대화가 끝나버린 경험이 많아 이 책을 읽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열심히 읽고 있다. 어린이는 섬세하고 예민하며 새로운 지식을 쭉쭉 흡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나를 귀여워해야 하는 아이, 또는 잘 어르고 달래면 말을 듣는 아이(어느 정도 사실이었지만)쯤으로만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보며 희미한 억울함을 느꼈던 경험이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감정-분노, 슬픔, 공포 같은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와 대화할 때면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고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재밌는 농담은 생각할 여유도 없고, 그래서 아이들은 재미없고 반응도 느린 나와 대화하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 것 같다(…)


‘무서운 일’이라는 챕터를 읽고 나니 어린 시절 나를 무섭게 했던 것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나는 무서워하는 것보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겁이 많았다. 곤충이나 동물은 겁내지 않았지만 놀이기구와 구기종목 스포츠는 보는 것도 무서워했고, 낯선 어른이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몸을 피했다. 귀신이 나오는 악몽도 자주 꿨고 고소공포증, 폐소공포증, 심해공포증, 어둠공포증 등… 정말이지 심약한 어린이였다. 그렇다고 소심하거나 수줍음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호기롭게 할 말 다 하는 성격이었다. 귀신의 집 입장 직전까지는 큰소리를 치다가 입장 직전에 줄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성격이었달까.

          

Joaquin Sorolla, The Wounded Foot, 1909


물론 지금은 전처럼 겁이 많지 않고 공포영화도 즐겨 보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스케이트다. 올겨울에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운영하지 않았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인파가 몰리는 서울광장을 볼 때마다 스케이트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만 이내 단념한다. 스케이트 타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유는 이렇다. 여기저기로 현장학습을 자주 다니던 초등학생 때, 반 전체가 실내 빙상장에 간 적이 있다. 스케이트를 타본 적이 없는 나는 지레 겁부터 먹었지만,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친구들이 스케이트를 제대로 가르쳐주겠다며 호언장담한 덕분에 긴장을 풀고 빙상장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거대한 빙상장으로 들어가고, 장비를 대여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들떠 있었다. 난생처음 신어보는 스케이트화를 신고 스케이트 선수가 된 기분을 느끼며 조심조심 빙판 위로 입장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설렜다.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까지는 예상했던 난관이었다. 나를 겁먹게 한 것은 미끄러운 빙판도,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도 아닌 우리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태도였다. 수련회 교관이나 수영장 강사 등, 어린 시절 만난 어른들 중 무서운 선생님은 참 많았지만 적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스케이트 선생님은 엄청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것도 우리 반 전체에게!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거나, 빙판 위에서 장난을 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강사는 시종일관 우리를 윽박지르며 벽을 붙잡고 서 있으라고 시킨 뒤, 균형을 잡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짧은 나무 막대기 같은 것으로 툭툭 쳤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만 불러내서 다짜고짜 빙판을 걷게 했다. 운동신경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는 당연히 포함이었다.


스케이트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만 골라내서 위태롭게 빙판을 걷다가 넘어지는 걸 지켜보고, 낄낄대고 웃으며 아이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코끝이 시큰거렸던 그 기분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지만, 그건 뚜렷한 모멸감, 수치심이었다. 그 이상하고 불쾌한 연습 시간이 끝나고 자유 시간이 찾아왔을 때 (대체 뭘 가르쳤다고 자유 시간을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다) 나는 씩씩대고 콧김을 뿜으며 스케이트화를 벗고 벤치에 앉아 친구들이 스케이트 타는 걸 구경했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빙상장에 가지 않았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다 양쪽 무릎에 나란히 피멍이 든 것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아직도 그 강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 뚜렷하고 분명한 적의는 뭐였을까? 어른의 세계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번째 경험은 조금 무거운 이야기다. 나는 소위 ‘깔깔이’라고 하는 누빔자켓을 싫어하고, 깔깔이를 입은 사람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위축된다. 이것도 초등학생 때의 일인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예절교육’이라는 것이 있어 한 달에 한 번은 한 학년 전체가 한복을 입고 등교했다. 다도 예절을 배우면서 차와 다과를 먹는 수업이라서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기억 속의 그 날도 예절교육이 있는 날이었고, 나는 평소보다 늦게, 친구들 없이 홀로 하교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집까지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기 직전, 건너편의 마트 앞에서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학교 건물에서 나왔을 때부터 교문 앞에 서 있던 한 할아버지가 나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땐 한창 엄마가 CSI 시리즈에 빠져 있던 시기였고, 나도 종종 옆에서 보면서 (물론 잔인한 장면이 나올 땐 엄마가 눈을 가려줬다) 범죄라는 새로운 종류의 공포를 접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순간 저 할아버지가 나를 해코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나는 엄청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입구부터 우리 집까지 가려면 좁고 어두운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 길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방향을 틀어서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까지 가는 길은 큰길이고, 학원이 있는 상가에는 어른이 아주 많으니까!


학원이 있는 상가로 들어가자 그 할아버지는 나를 더 따라오지 않았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뭔가를 기다리는 듯 상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학원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이 기억난다. 학원에 들어가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무용담을 늘어놓듯 나의 순발력을 자랑했지만 사실은 쭉 겁에 질려 있었다. 물론 그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연히 가는 길이 겹쳤을 뿐일 수도 있고, 정말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따돌리지 않았다면? 내가 운이 나빴다면? 그날의 경험은 그동안의 공포와는 결이 다른 선명한 공포였고 나의 좁은 세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체감하게 된 계기였다.


Pierre-Auguste Renoir, The Picture Book, 1895


물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또는 좋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말끔히 사라진 공포증도 많다. 계곡물에 들어갔다가 물이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다가 발이 미끄러져 깊은 물에 잠긴 적이 있는데, 정체불명의 어른이 나를 건져 올려준 덕분에 간신히 살았다. 나를 바위 위에 올려주고 홀연히 사라진 그 어른이 내 수호천사라고 자랑하고 다녔지만 아마 평범한 관광객이었을 거다. 신기하게도 한 번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니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둠공포증은 수험생활을 하며 극도의 피로를 겪다 보니 어두운 곳에서는 바로 잠이 드는 바람에 자연스레 사라졌고… 귀신은 여전히 무서워하지만 귀신이 주는 공포보다 재미가 더 커지는 바람에 오컬트 장르의 덕후가 됐다.


지금의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좀 더 현실적인 건강이나 돈, 뭐 그런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내가 느꼈던 무서움을 축소하고 싶지는 않다. 어른이 되면 잊힌다고들 하지만 사실 나쁜 기억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지 않은가? 어릴 때의 기억일수록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조금 더 상냥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의 거친 면을 더 잘 알고 있는 쪽은 어른이니까, 상냥한 세상만 보여줄 수는 없더라도 아이들의 무서움에 공감하고, '덜 무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어린이라는 세계> 링크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191260                     

*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원문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812


작가의 이전글 [Review]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