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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un 05. 2024

SNS 요지경

인스타그램 

가장 보통 인간들의 세상

페이스북의 하락세는 인스타그램에 악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으로 허세의 이미지만이 넘쳐나던 과거의 인스타그램이 벌써부터 그립다. 지금의 인스타그램은 릴스나 (자기들은 ‘수익 모델’이라고 포장하는) 홍보성 컨텐츠로 한몫을 잡으려는 돈벌이의 장으로 전락했다. 예전의 인스타그램은 돈 쓰기의 장이라고 누군가는 비꼴지 모르겠지만. 비욘세나 지드래곤이 파리패션위크에 참석해 명품 브랜드 의상을 과시하는 것이나, 요즘 한국인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도쿄나 오사카 같은 스팟에서 인증샷을 찍는 것이나 뭐가 그리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 똑같은 돈자랑 아닌가? 기왕이면 더 화려한 돈자랑, 그리고 돈자랑이 돈자랑으로 긍정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게다가 투자 유행에 편승한 어설픈 성공 서사, 동기부여랍시고 늘어놓는 잔소리들이란...      


그래서 나는 인스타그램 둘러보기 탭에서 연예인 사진이 아니면 잘 누르지 않는다. 릴스도 팬메이드 영상으로 보이는 것들을 선호한다. 댓글에서 연예인의 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기 최애를 ‘칭찬 감옥’에 가두는 훈훈한 광경도 재미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댓글들을 잘 보지 않게 되더라.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은 남자 아이돌 게시물에도 목소리를 억지로 만든다느니, 멋있는 척한다느니, 영어 발음이 유창하지 않다느니, 눈치 없이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보여서다. 얼마나 자아가 비대하면 영어권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 발음을 지적하거나, 방송을 타는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는 걸까. 80년대 후반생 연예인한테 ‘아저씨’라 하면 본인은 어리다는 느낌이 들까? 자기 인스타에는 당당하게 90년대생이라고 떠들었으면서. 자존감 높이기도 그 정도면 병적이다. 이런 류의 댓글들을 유튜브 영상에서도 본 것 같은데? (특히 릴스와 유사한 숏츠 영상에서)라는 생각이 들면, 기분 탓이 아니다. 타인을 깎아내리는 걸로 팍팍한 현실을 살아내는, 그러면서 자신의 자존감, 자존심 같은 것들을 악착같이 보충하는 한국 사회에 가장 깊이 침잠한 보통의 인간들. 소위 ‘머글’들의 정서를 인스타그램만큼 잘 보여주는 SNS도 거의 없을 것이기에.     



스레드

적절한 자기 과시의 정도는

메타 사가 트위터의 대항마로 선보인 스레드. 스레드를 쓰는 유저들은 의외로 메타 사의 형제 SNS 인스타그램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소비 과시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과시한다. 예를 들어 매일 10km씩 러닝을 한다든가, 미라클모닝을 며칠째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런 식의 자랑은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고, 비슷한 다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전도 된다. 문제는 이 자랑이 삶은 개인의 책임이자 성취라는 순진한 자기 계발 서사로 귀결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깔끔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 같은 것들이 “부를 끌어당기는” 비결로 과대 포장된다. (그렇다면 당장 한국 국민 중에 부자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소소한 성취를 이루는 이들이 이내 이성에 대한 자기들의 인기를 과장하거나, 자신의 외모에 과찬을 쏟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당장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와 성공의 루틴이 성공이나 명성이나 인기를 끌어당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의 자뻑에도 귀여운 구석은 있다. 멋진 나에 심취해서 세상 만물과 타인을 함부로 품평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어려운 문제다.     



트위터 

덕후들의 왕국

예전의 트위터는 가성비 있게 지성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일진 힙스터들의 놀이터 같았다. 트위터 설립자는 트위터를 그저 “커피가 마시고 싶다” 는 말 정도 나누는 곳으로 구상했지만, 마치 부모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커 나가는 자식처럼, 트위터는 단문 안에 온갖 논쟁과 심지어 혐오마저 눌러 담긴 플랫폼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좀 지나간 일. 텍스트 중심의 트위터가 이미지 중심의 인스타그램, 영상 중심의 틱톡에게 패권을 내주면서, 한산해진 그곳은(적어도 한국에선) 덕후들의 터전이 되었다.      


나는 새로워진 트위터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물론 페미니즘이나 비거니즘 같은 담론들이 트위터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시절도 지나갔지만, 적어도 그 담론들을 주도하던 이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다른 플랫폼에서 자신들의 의견과 운동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트위터는 그 글자 수의 제한 때문에 논의들을 담기에는 그릇이 작았다고 생각한다. 대신 단문에 맞는 논리의 곡해, 비약, 그에 따라 더 얄팍해진 이야기만 무성했던 게 아닌지. 나는 단문에는 담론 대신에 감탄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덕후들은 언제나 감탄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니까, 가장 트위터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물론 이 덕후들의 왕국에도 문제점은 있다. 가장 빠르고 민첩하게 최애들의 소식을 공유하지만, 가장 빠르게 루머가 확산되는 곳도 이곳이다. 기왕에 무엇을 애호한다면, 일단은 최선을 다해 그 대상을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저절로 따라온다.     



틱톡

청춘의 명랑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페이스북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틱톡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알 사람들은 다 아는 트위터  현자의 말이다. 틱톡 영상에 나오는 유저들은 일단 다 너무 어리고, 그들의 몸짓은 매우 현란하고 인위적이며 장난스럽다. 정말 저 ‘챌린지’를 하면 따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듣기로는 틱톡에 하이라이트 부분이 다 나오게 하기 위해서 노래의 재생 시간까지 좀 더 짧아졌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청춘의 명랑함이 다 저기에 있구나. 그 많은 챌린지들이 다 기쁨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오래가기를 바란다. 더 많은 틱톡을 보기 위해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까지 스마트폰을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은.     



페이스북

오피니언 리더들은 여전하다

커뮤니티 사이트의 인식이니 너네나 잘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지만, 페이스북은 한때 ‘파란 일베’나 ‘실명제 일베’로 불리곤 했다. 인터넷 실명제를 하면 깨끗한 온라인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페이스북은 처참히 짓밟곤 했다. 페이스북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패륜적인 말을 하거나 지역 차별·성차별·인종차별 발언을 유머랍시고 지껄였다. 그 유명한 ‘윾튜브’라는 극우 유튜버도 ‘유머저장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자신의 혐오 발언을 유머의 형태로 연습하지 않았나. 페이스북이 SNS의 주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과 혐오를 유희로서 즐기는지 절망하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그 많은 차별주의자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그 밖의 다른 온라인 공간으로 이주했을 뿐이지만 한적해진 페이스북은 세월무상을 실감하게 한다. 페이스북이 상징하던 한 시대는 끝났다. 한때 이미지는 ‘짤림방지용’으로서 게시글에 덧대어지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으로서 모든 것이 제시되어야 한다. 혐오든 유머든 의견이든 뭐든. 페이스북은 텍스트를 너무 많이 담고, 이미지를 너무 부차적으로 취급한다. 그래도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듣기에는 그만큼 알맞은 플랫폼도 드물지. 오늘은 그들이 무엇을 말했을까. 유력한 야당 정치인은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셀럽의 가십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주로 사회주도층 인사들이 촉발시키는 페이스북 대전을 보며 도파민을 충전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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