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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한 뇨뇨 Nov 02. 2021

장수의 늪

길가 집 아줌마와 아저씨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서울에서 살다 지금의 시골집으로 이사 왔다.

정류장 근처라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법했지만 수년을 살면서도 부부는 이웃을 초대하지도 그렇다고 남의 집에 방문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집 옆에 사과나무를 심고 , 매일 새벽부터 나무를 관리하고 두 부부는 동네에 살면서도 외딴섬에 살듯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것이 편했나 보다. 서울에 자식이 있어 그녀는 처음엔 한두 달에 한번 시골에 내려왔지만 어느새 자식들이 독립하고부터는  완전히 시골에 정착했다. 부부는 서울에 살다와서 똑똑하기로는 동내에서 첫 번째로 꼽혔으리라..


예전에 할머니가 말하시길 아저씨는 상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아주 큰 은행에서도  일했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은행에 높은 자리까지 갔으니 동네에서 알아줄 만한 인재였을 것이다. 폐가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한적한 시골로 내려왔다. 어쩌면 시골 사람들에겐 너무 똑똑한 그 집 부부가 못 마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착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고립된 채 자신만의 생활을 이어갔다.


간혹 서울에 사는 노모가 여름을 보내고 가곤 했다.

허리가 굽고 나이가 80이 넘었지만 '서울에 사는 똑똑한 할머니다'라는 인상이 뚜렷할 만큼 살림 솜씨가 남달랐던 기억이 있다. 백발의 할머니는 'ㄱ'에 가까운 허리였지만 하얀 모시옷을 정갈하게 다려 입고  집안을 바쁘게 다니며 살림살이를 쓸고 닦았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선하다.

나의 할머니와는 젊었을 때부터 서로 의지하던 사이라 '서울 할머니 신내댁'이 오면 한걸음에 할머니는 달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끼는 간장을 한병 내어 줄 정도로 할머니에겐 반가운 손님이었다. 할머니가 내려오시는 날 빼고는 그 집을 방문하는 이웃은 없었다.


길가 집 그녀가 60이 조금 넘은 때였다. 아줌마는 갑자기 몸에 힘이 없어지고 , 집안에서 자주 넘어지면서 머리며 몸이 성한데 없이 다쳤다는 소문이 들였다.  10년 전쯤 추석 연휴, 아빠의 연락이 왔다.

" 건너집 아줌마가 너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가서 인사라도 하고 와라"

시골 인심이라는 게 그랬다. 나는 바빠 병문안 못 가니 자식이라도 근처에 있으니 대신 들여다 보라는 의미 반과, 우리 아이가 그 병원에 있으니 예의로 부모님의 지인은 찾아 인사시키면서 또 다른 자식 자랑이기도 했다.


" 저 건너집 혜원이요"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남 보듯 멍한 상태로 나를 봤다. 학교 졸업 후 거의 10년 이상 그녀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내가 누구 딸이라고 해도 이미 그녀는 몸이 많이 상한 상태처럼 보였다.

무표정함, 종종걸음 걸이.. 누가 봐도 파킨슨 병이었다. 치매까지 겹쳐 그녀는 예전의 똑똑한 서울 여자가 아니다. 젊은 나이에 병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한동안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병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나아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은 나빠졌다.


처음엔 남편이 시골집에서 돌봤다. 그러다 아저씨가 일하러 간 사이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식사까지 못하는 지경이 되자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퇴원을 하면 시집가지 않는 딸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녀를 간호했다.  비위관(코와 위를 연결한 관)으로 매 끼니 그녀의 딸은 엄마의 식사를 챙겼다고 했다. 엄마를 포기할 수 없어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수년 동안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 엄마를 간호했지만 그녀는 결국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매월 크게 치료하는 것이 없이 누워 지내는데만 월 250만 원의 입원비가 들어간다고 했다.


100살 넘는 시어머니보다 며느리가 치매가 먼저 와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서울 할머니 신내댁도 몇 년 후 치매에 걸렸다. 강원도로 귀농한 둘째 동생이 어머니를 모신다고 했다. 처음엔 심하지 않던 치매도 시간이 지나니 며느리를 의심하고 , 정신마저 놓아버려 결국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작년부터 아저씨는 아내를 서울에서 집 가까운 안동으로 데려오려고 많이 알아봤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무산됐다고 했다. 그리고 100살이 훌쩍 넘은 어머니도 이제는 치매가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장남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아픈 아내가 있어 병원비 되는 것도 빠듯했을 것이다. 평생 농사 지어 모은 논과 밭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밤낮으로 아내와 일궜던 집 옆의 작은 과수원만 남았다.


울까지 갈 수 없으니 그는 매일 요양병원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 했다. 병원이라도 가는 날이면 그의 차는 간호사와 의사에게 줄 음식과 선물들이 가득했다. 멀리 있지만 항상 마음만은 이렇게 관심이 있으니 잘 봐달라는 인사 치래였다. 그런 그에게 감동한 의사는  매일 저녁 영상 통화를 걸어 몇 달째 그에게 환자의 상태를 알려준다고 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며칠 전 친정에 가서 본 그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주말에도 빠짐없이 매일 의사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는데 일주일 넘게 감감무소식이라고 했다.

한 달 전 아내를 찾았을 때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했다.

 뉴스에서 아내가 있는 병원에 코로나가 터졌다고 했다. 다수의 환자와 의료진이 걸려 병원이 폐쇄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녀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넘게 전화를 걸어 주지 않는 것으로 봐 의사가 코로나에 걸렸음이 확실했다.

코로나로 거의 일 년 넘게 요양병원에 보낸 100세 넘은 노모도, 70이 넘은 눈만 뜨고 있는 아내도 영상통화로만 볼 수 있었다. 이산가족처럼 만나지 못하니 애달프고 힘든 시기를 함께 했기에 그에겐 목에 가시 걸린 듯 밥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밭에서 일을 하는 동안 1분이 짧다 하고 줄담배를 피워댔다. 혼자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과 마지막 눈물을 줄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이 생각나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요일 일하시는 부모님 드시라고 뜨끈한 선짓국을 사서 친정에 갔다.

점심을 먹다 아빠는 내심 맘에 걸렸는지

 

" 형님, 뜨끈한 국물에 밥 같이 먹게 오시소.. "

한술이라도 뜨게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동네 살면서 남의 집에 오지 않았던 그도 이제는 80이 다 되어 가니 마음의 벽은 조금 무너졌나 보다.. 한 술 겨우 뜨고 집으로 갔다. 담날 저녁에도 아빠는 일을 마치고 청량초와 문어, 해물이 들어간 뜨뜻한 칼국수를 끓여 드렸더니

" 국수 한 그릇 담아둬라. 건너 형님 한 그릇 드려야지 " 급히 식사를 마무리하고는 식을까 뚜껑을 덮어 건넛집으로 국수를 퍼다 날랐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마음을 의지하는 또 다른 가족, 형제가 아닐까 싶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서울 할머니 신내댁에게 간장을 갖다주듯 오랜 시간 지나면서 형제처럼 의지하는 형님 동생이 된 것 같았다.


몇 년째 아줌마가 요양원에 있으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는 아빠가 유일했었다. 주말 친정에 가면  아빠는 그 집의 여러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아저씨는 몇 년 전부터 치매에 걸린 노모와 아내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수십 번 이상 장례는 어떻게 치를지 친정아버지와 상의하곤 했다.

100살이 넘어 이제는 몇 살 인지도 모르는 노모,  아내의 병 뒷바라지하느라 80살이 다되어 가지만 정작 자신은 아플 겨를도 없다. 밤낮으로 외로운 시골집에서 나무에 매달려 사과를 돌보고, 줄담배로 시름을 잠시 잊는다. 눈만 뜨고,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남편인지, 자식인지도 모르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그는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가끔 길가 집 아저씨의 안부를 물어보면


" 죽는 것도 쉽지 않아"

아버지는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듣는 내내 듣는 나마저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내 마지막이 의미 없이 생명만 연장시키는 삶이 아니길.. '

누구에겐 그래도 그리움의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수의 시대가 한 번씩 몸서리치게 만든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언제 가는 아파질 텐데..

내가 어릴 적엔 상상도 못 했던 100세 시대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시대가 됐다. 오래 사는 것이 이제는 불행의 씨앗이 되버린건 아닌지 씁씁한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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