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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한 뇨뇨 Jan 11. 2022

새해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

2021년을 마무리하고 2022년을 맞이하면서 시작에 관한 책이 아닌 죽음에 관한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 죽음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더 이상 죽음은 어둠이 아니라 '삶을 밝히는 등불'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100세 시대,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된 것처럼 모두의 삶에서 죽음은 잊힌 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전령이 나타나기 전까지만해도 죽음이란 존재는 은 뉴스에서 나오는 남의 이야기처럼 무미건조하게 지나갔다. 


코로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미국에서는 제때 처리하지 못한 시신들이 냉동창고에 쌓이고, 쉴세 없이 매장하는 영상이 공중파 방송을 타면서 누구나 어느 한순간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가 내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어릴 적 집이라는 공간에서 삶과 죽음이 함께 존재했다. 

어느 봄날 잠에서 깨어 가보니 엄마가 눈이 커다란 동생을 낳은 공간도 집이었고, 

어느 날 깨어 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척들이 모여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고, 염을 하던 곳도 집이라는 공간이었다. 


생로병사를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던 집이라는 공간이 이제는 울음소리도, 곡소리도 살아져 버린 지 오래다. 당연히 죽음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고 살아가기만 한다.  누구나 영원히 살듯 앞만 보고 살아가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닥치는 불행이 되어 버린다. 


왜 우리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살아갈까?

왜 나에겐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며칠 전부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죽어가는 이의 삶의 통찰이 담긴 책을 곱씹어 본다. 



" 지금껏 나는 여섯 살 때 내게 들어온 죽음 의식을 가지고 매일 하루치를 죽고, 하루치를 살았다네. 그런데 지금은... 나는 갯벌이 되고 암은 게가 돼서 내 몸에서 기어 다니고 웅성거리고 있네....( 중략) 평생 죽음을 느끼고 살았지만, 나도 별 수 없이 똑같은 사람일세. 철창 안에 있던 동무원 호랑이가 철창을 나와 나한테 덤벼들고 있어." 


죽음을 80년 이상 생각하고 , 또 느낀 그도 죽음 앞에서는 철창을 뚫고 나와 덤비는 호랑이처럼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그것이 두려워 외면하고 덮어두려고 한다.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죽어가고,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을 기억하며 삶을 더 귀하게 살아가고 싶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많았다. 너무 앞만 보고 살아오느라 정작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생이 영원하다 생각하고 소중한 것을 '나중에' 하며 미루고 살아가진 않았을까?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는 매일 나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타인을 위한 삶, 타인을 모방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이르는 삶을 위해 더욱 내면으로 내면으로를 외치며 살아가고 싶다. 


온전한 나로 나는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이다'라는 <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삶을 찾아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나선다.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삶'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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