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사건을 통해 본 거짓된 말과 글의 충격
정인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큰 충격은, 입양했다는 남성과 여성(양부모라는 표현은 살인자에게 적절치 않은 것 같다)의 이력이었다. 첫째 그들이 기독교 가정에서 목회자 자녀로 자라났다는 것, 둘째 남성은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고 여성은 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
첫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그간 보여왔던 언행불일치의 전형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기사 목회자나 교회 원로가 부끄러운 짓을 벌인 사건이 어디 한 둘이던가. 게다가 정인이를 입양했던 여성의 친정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교회 부속으로. 누구보다 가장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풍에서 자라났을 여자가 1년 6개월 짜리 여자아이 하나를 유린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다.
그런데 나는 두 번째 문제에 좀 더 주목하고 싶다. 여성과 남성이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여성은 분명히 통역사라는 전문적 직업을 갖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영어와 국어로 말하고 쓰는 연습을 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오류 없이 최적의 번역을, 행간까지 찾아 가며 해내는 것이 통역사라는 직업 아닌가. 게다가 말과 글은 '거의 자기 자신'이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남의 감정까지 읽어 내고 다시 언어로 풀어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식이라고 들인 아이에게는 그렇게 잔혹했을까. 자기 부인이 그렇게 잔인한 줄 몰랐다고 거짓 변명을 하는 남편은 방송사 노조원 출신이라고 한다. 콘텐츠업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 사람이 집안에서는 전혀 공감지능을 발휘하지 않고, 오히려 짐승처럼 돌변한 것이다.
정인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가 매일 이어질 때마다 점점 남성과 여성이 '의도적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검찰과 사법부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최근의 검찰, 법원 관련 논란도 있었으므로) 업무를 처리하려 애쓰고, 가급적 자신들의 수사나 기소 요지가 유출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하다. 그럼에도 검사와 판사들조차 외면하기 어려운 점은,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분노 아닐까. 어쩌다 정인이 사건을 처음 접한 이후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카페를 거의 매일 들어가서 보게 된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위선적이고 잔인한 '남성과 여성'에게 분노하고 있다.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으면 파양(罷養)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왜 이토록 입양부모들 욕을 먹이냐"고, "대출을 받기 위해서 정인이를 이용했던 것이냐"고.
나는 일련의 논란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좀 배웠다 하는, 말과 글로 먹고 산다 하는 사람들이 저토록 악독한 실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라고 본다. 그간 아동학대 관련된 연구나 분석들은 대부분 경제적 원인을 1순위 요인으로 들어 왔다. 못살아서, 가난해서 아이를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막상 사례를 접해 보면 아동학대는 아주 지배적인 선행요인이랄 게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소아청소년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동학대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매우 무서운 폭력"이라고. 다시 말해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분들도 조금만 마음을 잘못 쓰면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글도 저열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토대 위에 서면, 형체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법이다. 문자와 언어, 표현이 과잉인 시대에 우리는 점점 정인이의 법적 양부모 같은 존재들을 만날 가능성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일본의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글은 곧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글에 적어 남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가면서 변모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말과 글을 하는 동안 골백번도 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셈이다. 그런 말과 글이 정인이 양부모와 같은 위선자들의 그것처럼 비화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가슴과 눈물이 없는 사람에게 더 이상 말과 글의 오피니언 리더십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책임도 느껴진다. 거짓의 모래성이 아니라 진심과 열정으로 쌓은 탑이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정인이 사건을 보며 누구보다 가슴을 치고 자기 자식을 향한 태도를 돌이켜 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눈물과 분노' 덕택에 우리가 보다 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신애라가 말한 것처럼 이 흐름이 몇 주 지나면 조금씩 뜸해지고, 나중에는 정인이 사건도 미디어 상에 노출되었던 '잔인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눈물과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세월호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아이의 잔혹한 죽음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가슴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가식적인 지식이나 현란한 경구가 아니라 눈물과 분노의 힘이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