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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Oct 24.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1

조선은 어떻게 망했을까 - 1. 대부분 망국의 원인은 내부에 있다

이 연재는 2018년에 책을 쓰려고 작업했던 원고를 출발점으로 한다. 원래 내 관심사는 "영조, 정조 시대가 과연 태평성대였을까"였다. 두 임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명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성격적으로 가장 결함이 많은 사람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한 사람은 친아들을 죽였고, 다른 사람은 지독할 만큼의 편집증 환자로 아랫사람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다. 공교롭게도 두 지도자의 '하드 워킹' 덕분에 후세는 그들을 리더십의 모범으로 기억한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부터 조선의 문을 닫았던 순종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모두 "영, 정조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사상적 기반으로 활용했다. 정말로 훌륭한 통치였다면, 오랫동안 답습되는 동안 계속해서 개선되고 좋은 선례를 많이 남기는 게 맞다. 하지만 순조 이후부터 조선의 정치는 점점 안좋아지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모두가 훌륭하다고 극찬했던 리더십이 사실은 나라를 망하는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정신적 씨앗이 아니었나 역추해 보고 싶었다.

개화파의 핵심이었던 양반자제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망국의 과정에서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주제는 '개화(開化)'다. 많은 사람들은 상투를 자르고, 철로를 놓고,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사례들을 개화의 증거로 이야기한다. 총리 김홍집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자주 거론되는 개화의 제도적 결과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랏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하는 바람직한 문명화 과정" 쯤으로 치는 개화는 실상 '서구화'라고 부르는 게 맞다. 조선사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개화는 엄연히 한 세력의 이념과 이익이 결부된 정치 사조다. 효명세자의 측근이자 대원군의 부하이기도 했던 박규수(그는 실학 사상가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가, 당대 최고의 귀족 자제들만 모여 결성한 혁명가 서클이 '개화파'다. 그 멤버는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같은 피가 뜨거운 리버럴리스트들이었다. 이들은 미국, 중국, 일본 등을 넘나들며 얻은 식견, 인맥, 자원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나라를 바꿔 보려고 몸부림 쳤다. 하지만 그들이 애를 쓰면 쓸 수록 나라는 더 안좋은 상황으로 가 버렸다. 권력을 장악한 집단(민씨를 포함한 수구세력)은 애초에 개화파와 상황을 인식하는 틀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 틀은 오래 전부터 조선의 기득권층 사이에서 공공연했던 '이념 갈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18세기 중후반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진보 이념으로 통했던 낙론(洛論)을 계승한 반면, 수구파는 보수 이념으로 통했던 호론(湖論)을 받들었다. 사도세자에 대한 정치적 태도, 천주교 박해에 대한 입장, 흥선 대원군의 '현명한 독재' 과정과 같은 정치 이슈 곳곳에서 낙론-호론의 이념적 긴장관계를 볼 수 있다. 흔히 조선은 주구장창 안에서 싸움박질만 하다가 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그 '싸움'에도 나름 이론적 근거가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개화파의 이론적 시발점인 '낙론'의 대부 김원행. 그는 안동김씨 최고의 사상가로 김옥균의 윗대 조상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이 합병 문서에 사인하며 망하던 날, 고종 황제는 일본 정부로부터 비자금을 받아챙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실감했다. "이제 사람들이 망국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외세의 각축장에서 우유부단하게 처신한 것이 망국의 원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쇠망하는 이유는 의외로 내부에 있다. 오랫동안 조직이 성공공식처럼 답습해 오던 관행이 고질병이 되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부패를 낳는다. 이때 감당하기 어려운 국외 환경의 압력까지 밀어닥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 뿐만 아니라 1차대전에 패배한 독일(정확히는 독일 제국), 1940년 나치 독일에게 잠식당해 버린 프랑스 같은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조선망국사'를 어느 정도 일별한 이후에는, 독일 제국과 1945년 이전의 프랑스에 대해서도 다뤄 보려고 한다.

잘 계승되어 오던 독일 제국을 20여년 간의 오판으로 망하게 만든 빌헬름 2세.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조선의 고종을 닮은 바가 있다.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면서 일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는 거의 없다. 제 딴에는 잘 해보려고 했던 짓들이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국가를 붕괴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심히 했는데 왜 나라가 폭삭 망했을까." 그 이유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 끊임없이 악인(惡人)이 양인(良人)을 구축하는 과정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 리더 뿐 아니라 조그마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큰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도 읽고 받아들이기 쉽게 망국론(亡國論)에 대해 적어 내려 가 보려고 한다.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불리는 비시 프랑스 시기(1940-194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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