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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Oct 25.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2

조선은 어떻게 망했을까 - 2 개화파는 일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밤, 조선 조정에는 큰 변고가 일어났다. 광주 유수 박영효,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우정국(체신부) 축하연을 빌어 고관대작들을 모아둔 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명문 민 씨의 기대주 민영익은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개화파 장정들에게 당해 크게 중상을 입었다. 왕비의 오빠였던 민태호는 참살을 당했다. 개화파가 이끄는 1,000명의 군대는 순식간에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모셔 갔다. 임금을 끼고서 천하를 호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거사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청나라 군대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약 1,500명의 병력이 국외로 빠져 있었다(그전까지는 위안스카이가 3,00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전개도.

정변의 핵심 기획자였던 박영효는 훗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930.01.05)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즉시 청나라 군대를 도모하러 가자고 했으나 김옥균 등은 듣지 않고 쿨쿨 자기만 했다." 만약 김옥균 등이 야밤에 청군을 습격했다면 아무리 정예부대라 하더라도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대세를 장악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왕비는 밤사이 위안스카이 쪽에 전갈을 보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했다. 조선 왕과 왕비가 개화파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명확해 지자 청군은 다다음날인 19일 창덕궁을 공격해 개화파 부대를 일격에 섬멸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도록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김옥균은 자신이 생각한 내각 명단을 발표하고 온갖 개혁 조치를 발표하는 데 힘을 쏟았다. 나라의 문이 강제로 열린 이후(1876년), 8년 만에 이룩해 낸 거사였다. 일본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까지 개입해 물 건너온 폭력배들이 전위대 노릇을 하며 개화파 군대의 앞길을 인도한 쿠데타였다. 김옥균은 오랜 세월 분을 품으며 이뤄낸 성과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영효.

박영효는 정변을 일으킨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왕비와 그 세력이 정말 성가셨다. 임금은 아침 열 시에 종묘에 신하들을 모은다고 해 놓고, 오후 네 시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종묘 인근의 민가를 빌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했다. 상감은 정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1930.01.04, 동아일보). 민 씨 세력은 오밤중에 박영효에게 전갈을 보내 전라 관찰사인 형 박영교가 누군가를 처벌하지 않도록 독촉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는 피 끓는 청년 귀족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했다. "우리는 애당초 일본을 본받아야 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꼰대들이 숭배하는 청나라를 쳐내고, 문명국처럼 여겨지는 일본을 등에 업고 난(亂)을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개화파는 일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갑신년의 실패는 우리 동지가 최후까지 조심을 못했다는 데 있다." 왕을 경우궁 옆 계동궁에 모시고 나서는 모두와의 소통을 막는 게 철칙이었다. 그러나 철통 방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 씨 세력은 왕이 드는 수라 그릇에 비밀 편지를 숨겨 두어 쿠데타의 사정을 알렸다. 실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덕궁으로 고종을 옮기고 나서 일본 군대와 개화파 군대가 함께 궁문을 지키고 있는 와중에 청나라 병사 일부를 '전갈'을 명분으로 안으로 들인 것이었다. 그 이후 위안스카이가 "국왕을 뵈어야 겠다"며 1,500명의 군사를 몰고 오자 실제 창덕궁 수비병력 50명이 이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 개화파들의 단꿈은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박영효는 말했다. "만사가 운수건만, 우리들의 천하는 일일로 끝나고 말았수다." 역사에서는 3일(음력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천하라고 기록하지만, 실제 개화파 정부가 구성된 것은 18일 하루에 불과했다.

개화파가 우정국 축하연에서 제거하려다 실패했던 민영익. 그는 원래 김옥균에게 최대의 협력자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그를 배신했다.

만약 거사가 성공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21년 뒤 한반도는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주고 껍데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타력(他力)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자력(自力)에 의한 용일(用日 : 일본을 이용)이었다면 우리 신세가 조금은 나았을까. 지금 와서 되짚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개화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찰나의 단잠"으로 날려 버렸다. 누구 말마따나 그때 고종을 한양 밖으로 납치해 아예 민 씨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버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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