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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Oct 25.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3

조선은 어떻게 망했는가 -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당시 국내외 사람들이 "조선이 망할 것"이라는 데 모두 합의하게 된 계기가 '을미사변'(1896)이 아니었을까. 한밤중에 외국인 폭력배들과 군인들이 작당해 왕비를 참살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명성황후가 악인(惡人)이라 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98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인 씨시가 이탈리아인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당한 바 있었다. 1914년 7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부인과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세 가지 사건 모두 국제정치적 갈등이 주된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오스트리아와 달리 왕비를 참살한 당사국에 보복할 힘이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국가 지도자 급의 암살 이후 전쟁을 일으켜 망국의 길로 갔다면, 조선은 굴복과 묵인으로 인해 망국을 자초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당한 오스트리아 황후 씨시.

왕후 민씨의 암살은 극동에서 핀치에 몰린 일본이 전략적 탈출구로 삼은 사건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의 승전 이후 일본은 상당한 배상금과 영토(대만, 요동, 펑후열도)를 거머쥐었다. 한때 서양의 함포외교로 굴욕을 당했던 나라 입장에서는 혁명적 변화였다. 조선에서 청(淸)의 세력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던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뒤에는 영국이 있었다. 대륙에서 일본의 세력을 키워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세계전략의 기획자가 영국 정부였다.


1813년부터 두 나라는 중앙아시아의 곳곳에서 서로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그레이트 게임'). 군사 대국이었지만 가난했던 러시아의 발을 극동에서 묶어 두고, 중앙아시아와 흑해 연안에서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것이 영국의 과제였다.


삼국간섭을 표현한 그림.


하지만 영국 국왕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혈연 관계에 있었던 니콜라이 2세(세 사람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다)는 국제정세에 영 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1895년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였다. 독일은 마침 1890년 어처구니 없이 '재보장 조약'(러시아와의 상호불가침 조약) 갱신을 거부한 이래 외교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막대한 차관을 지원하면서 동맹(1892)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들 간의 치밀한 이해관계 대립을 노린 니콜라이 2세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일본은 청일 전쟁 후 화친조약(시모노세키 조약, 1895년 4월)을 맺은지 한 달(1895년 5월)만에 요동반도를 도로 토해 내야 했다.

                  

청나라 대표 이홍장과 일본 대표 이토 히로부미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

이 사건 이후 러시아는 남만주 동청 철도 사업권을 따냈다(1896년 9월). 청나라에 요동을 되찾아 준 대가였다. 이 사건은 극동의 경제를 러시아가 주도할 수도 있다는 함의를 갖고 있었다. 왕후 민씨와 고종 입장에서는 "이제 일본이나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를 등에 업을 필요가 있다"는 계산을 할 만 했다.

                              

친일 성향의 총리 김홍집.

당시 조선 정국의 주도자는 친일(親日) 성향의 총리 김홍집이었다. 그는 김옥균 등과 행동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박규수 제자 그룹의 일원이었다. "나라 문이 자발적으로 열리지 않으면, 외력에 의해 강제로라도 열어야 한다"던 강위(姜偉)도 김홍집의 스승이었다. 그는 왕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조선이 발전하려면 왕실 측근이 아니라 전문화된 관료 통치에 의해 분업화된 행정체계가 정착해야 한다는 입장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당시 독일의 프로이센으로부터 받아들인 관료제의 정신이었다.


민씨와 고종의 입장에서는 권력이 왕에게서 관료로, 그리고 입헌정치로 넘어가는 과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들어 엎자면 일본의 간섭을 줄이고 러시아처럼 "조선 내정에 적당히 무심해 보이는" 나라가 필요했을 지 모른다. 이 선택이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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