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결심하고 실패하는 이들을 위한 소소한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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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나갈 때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다양한 곳들에서 일하며 자주 이직을 했는데 일하지 않는 기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백수 시절'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오늘은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글을 시작하니 약간 백수 전문가가 된 느낌도 들고...? 그래, 백수 전문가도 일종의 전문가이니(?) 오늘부터 백수 전문가가 되어 보자! 하하하. 아무튼 지나온 이직의 여정을 말하자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데 그동안 대략 7~8개 정도의 직업을 거쳤다. 아직 법적으로 만 39세임을 감안하면(갑자기 30대인 척하기 있나요?) 적은 건 아닌 듯하다. 스물다섯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된 것을 시작으로 국책연구기관 위촉연구원, 교육 회사 연구원, 스타트업 공동대표, 진로진학 강사, 대학 입학사정관, 국어교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엉덩이가 가벼워도 이렇게 가벼울 수가!
예전에는 한 직장을 오롯이 다니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나온 여정을 제법 긍정하고 사랑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수많은 삶의 장면들과 그 안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을 테고, 지금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십 년 후에 다시 탐구하기로...) 물론, 그 대가도 컸다. 얻는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 어쨌든 이러하였기에 그 사이사이의 휴지기 역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게는 2년, 짧게는 몇 개월을 주기적(?)으로 쉬면서 백수이거나 반백수인 시절을 오래 보냈다. 마냥 쉰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활로를 모색했다. 주로 입시 설명회, 진로 콘서트의 사회나 MC를 보았고 스토리를 각색하는 외주 작업을 하거나 원고 교정을 보았다. 잡지에 글을 싣거나 상을 타서 살림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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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래서 어떻게 하면 백수 시절을 잘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잘 보낸다'라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를 듯하다. 일을 쉬게 된 사유가 저마다 다 다르듯이 쉬어가는 시절의 목표도 다 다를 것. 그래도 공통적으로 이것만은 꼭! 을 꼽아 보자면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정신 건강
2. 몸 건강
아, 너무 뻔한데? 게다가 일을 쉬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챙기게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렇다. 게다가 시간적 여유에 더해 자율성까지 생기니 그야말로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셈. 그런데 과연 그럴까.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럴 수 있다. 푹 쉬면서 몸도 챙기고 마음도 날아갈 듯하다. 하지만 이 시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에는 어려움이 쌓이게 된다. 당장 먹고사는 일도 그렇지만, 꼭 생계가 아니더라도 종일 일정한 루틴 없이 홀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루틴을 만들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뒤로도 건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위한 여러 팁들이 있겠지만 내 경우 다년간의 백수 시절을 보내며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바로!
'위클리 플래너(Weekly Planner)'이다.
엥? 극 P형인 주제에 플래너? 크흠, 즉흥적인 사람도 플래너를 쓰긴 씁니다. 근데 이제 앞부분만 자주 시꺼메지죠. 이건 마치 수학의 '집합과 명제'이자 영어의 'To 부정사' 같은 뭐 그런... 하지만 상관없다! 두 장 쓴 플래너는 잘라 내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엄청난 플랜맨들이 보면 뭐야 저게 싶겠지만 그리고 훌륭한 팁도 이미 너무나 많이 있지만... 나처럼 자주 결심하고 실패하고 다시 결심하는 '유약하고 찬란한 결심족'들을 위해 사소한 팁이지만 남겨 본다. 이게 무슨 팁이야 싶을 정도로 소소하고 쉬워서 오히려 실천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랄까. 어렵지 않아야 계속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이 방법으로 무수히 많은, 기약 없는 날들을 버티며 지나왔다. 방법이랄 것도 없다.
첫째, 위클리 플래너를 하나 산다.
둘째, 전날 밤 혹은 당일 아침에 그날 할 일을 쭉 목록으로 적는다.
셋째, 목록을 이행하고 나면 벅벅 지워 버린다.
이게 다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걸로 건강을? 어떻게? 이게 왜? 아마 다들 눈치챘겠지만, 이렇듯 사소한 습관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과 몇 년의 어둑한 시간을 견디게 해 준다. 갑자기 생긴 삶의 공백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루틴을 만들어 주는 셈. 가끔은 신소리도 쓰고 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도 괜찮다. 잘 쓸 필요도 없다. 너저분해도 되고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 나는 완전 대충 쓴다. 중요한 건 망해도 계속하는 거다. 하루 이틀 빼먹고 때로는 열흘, 한 달도 넘게 안 하다가 생각나면 또 하고, 생각나면 또 하고... 그냥 그러면 된다.
위클리 플래너는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 사면 된다. 그런데 가끔 보면 각 일자마다 줄이 처져 있거나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진 것들이 있는데 그런 건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 오전에 일이 더 많을 수도 있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무선'을 추천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아래처럼 생겼다. '주말 부분'의 칸이 좁은 게 아쉽지만 대체로 만족하면서 쓰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는데 가장 좋은 건 문구점에 직접 가서 보고 사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실제 예를 들 차례인데, 사실 너무 별 거 없어서 몹시 부끄럽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누군가가 이걸 보고 용기를 얻어 생활의 패턴을 잡아나갈 수 있다면! (그래도 부끄러워!)
개인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그래도 노멀한 날들로 가져와 봤다. 아, 글씨는 원래 더 잘 쓰는데 저 날 컨디션이... (예? 계속 그런데요?) 이렇게 공개할 줄 몰랐어요.... 각 잡고 쓰면 더 잘 쓰... 다들 뭔 말인지 아시죠?
인명과 쓰고 있는 소설 제목은 블러 처리했다. 보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 적었고 그게 다인 날들도 많다. 예를 들면 19일인데, '집안일'만 세 개의 항목을 차지한다. 이렇듯 세세하게 나누어서 쓰는 게 핵심이다. 그래야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스스로에게 명확히 인지시킬 수 있고 하나씩 지워 나가는 보람이 크다. 그냥 '집안일' 이렇게만 적어 놓으면 안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을,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명확한 표현은 동력을 잃게 만든다.
또 하나 명심할 것은 못한 일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위 사진에서도 보면, 운동에는 유독 '쫙쫙 줄'이 없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안 했다는 소리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내게 필요한 일을 쓰는 게 중요하다. 달성 못했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이가닉 효과'라는 게 있다. 이 개념은 교육학에서 사람의 내적 동기를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힘으로 설명된다. 즉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목표나 과제를 떠올리며 긴장감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해당 과제를 끝내 완수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냥 전날 완수하지 못한 목록을 보면 다음 날 마음이 찜찜해 그것부터 하게 된다. 가령, 어제 맛집에 관한 글을 하나 쓰기로 했는데 못 했다면 다음 날에는 그걸 좀 더 우선순위에 두고 실행하게 되는 이치랄까.
내 경우 요즘에는 이전에 수행하지 못한 목록들은 형광펜으로 표시해 두고 어느 날 마음먹고 죽 해 버린다. 물론, 안 되는 날이 더 많다. 밀리는 건 계속 밀리게 되더라는 게 정설...!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 가령 10번을 해야 하는데 5번밖에 못할 것 같아서 아예 시작하기가 싫다면 그 5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거다. 이게 최근 3년간 내게 일어난 변화 중 가장 획기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이다. 0번보다는 5번이 산술적으로도 훨씬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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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부끄럽다. 하지만! 기록용으로 남겨 둔다. 실제로 나는 이 방법을 꽤 오래전부터 써 왔다. 특히 학생 때 효과를 많이 보았다. 요즘에는 뭐 공스타그램도 있고 유튜브로 인증하는 갓생러들도 많은데, 그런 천상계 분들 말고 나처럼 매일 결심하고 번복하는 사람(+무계획형)들에게는 그냥 이 방법이 제일인 것 같다.
글이 길어졌는데, 저 위에 보면 4일이라고 쓰인 곳 아래에 적은 말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해 보려 한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것이 오래된, 내 백수 시절의 모토이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들어갈 목록들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해야 할 일에 주로 '청소와 산책(운동), 글쓰기'는 꼭 넣었고, 할 수 있는 일에 '책 읽기와 좋은 사람과의 대화' 등을 넣었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안전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들 각각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루 한 번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면 몸 건강은 물론 마음의 건강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할 일은 뭘까. 나머지는 그냥 그런 채로 시간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런 채로 지나가야 하는 시간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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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드라마를 하나 보았다. 10년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콩트를 무대에 올리며 무명 개그맨 생활을 이어 오던 청년 셋이 콩트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이들을 말리던 관계자가 이런 말을 한다.
지금은 인내할 때야.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금이 한계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다시 한번 더 힘을 냈어.
<콩트가 시작된다> 2화 中
글쎄.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계속하든 포기하든 어느 쪽이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무엇이든 아직 포기가 안 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아직 못 찾았다면 그리고 힘이 남아 있다면, 인내하는 것도 한 방법일까. 그런데 인내도 쓰고 열매마저 쓰다면? 그래서 과정이 주는 희열이 있어야 한다. 내가 그 일을 하며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없는데, 이를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보상을 바라며 그 일에 뛰어들겠는가. 그러면 오래 못 간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놓지 않고 걷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소소하게 목록을 작성하고 지우며 살아간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이 하루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오늘도 분투하는, 모든 영혼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