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밤부터 오늘의 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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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 있었다.
짙은 풀 내음이 대기를 휘감고 돌다 코끝을 스쳐 땅 위에 내리고, 석양이 긴 꼬리를 그으며 땅속으로 스며들면 그제서야 하나둘 기어 나오던 사람들. 뜨거운 바람이 잠을 앗아간 밤에 무엇을 할까 머리를 맞대고 풀벌레 소리에 발장단을 맞춰 보던 1996년, 여름밤.
그날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동네 친구들 서넛과 어울려 낯모르는 학교 운동장에서 펑, 펑 불꽃놀이를 했더랬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귀에 꽂혔다. 힉! 우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관리인 아저씨는 흡사 터미네이터 같았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못 지르고 일단 아무 방향으로 죽도록 뛰었다. 그 와중에 잠깐 올려다 본 하늘은 잔잔한 강물 같아서 눈앞에 벌어진 일이 혹시 꿈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파란색과 하얀색이 섞인 스프라이트 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필 모자가 달려 홱! 하고 낚아채면 잡힐 듯도 한 모양새였다. 그러니 아둔한 운동 신경으로 안 잡힐 리가 없었지. 1분이나 뛰었나?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마구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는데, 그만 육중한 손이 모자를 잡아챘다. 헉! 하는 것도 잠시.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아저씨의 손을 뿌리친 뒤 기를 쓰고 내뺐다. 그 바람에 부욱, 모자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너덜거리는 모자를 목덜미에 이고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 순간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우뚝 멈추어 서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가슴은 쿵쾅대고 뺨은 뜨겁고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은데 풀 향기가 코를 찔러서 후하 후하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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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는 반전이 있다.
나는 불꽃을 쏘지 않았다.
서울로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하루의 대부분을 주눅 든 채로 살았다. 누군가 놀러 가자고 한 것을 거절은 못 하고 쭐레쭐레 따라갔다가 일이 점점 커져 버렸던 것인데- 이미 거기까지 간 마당에 불꽃놀이를 말리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집에 가겠다는 말도 못 해서 부러 멀찍이 떨어져 그냥 불꽃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 하는 소리에 제일 크게 놀라 쏜살같이 내빼 버렸던 것. 지금 생각해도 아주 어설프기가 그지없었다. 나중에 우리들은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뜨린 채 하나둘 운동장으로 모여 들었고, 서로의 안부를 대충 확인하고는 그대로 헤어졌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뛰어들어 가 찢어진 옷을 벗으며 아직 못다 쏜 불꽃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아직 남아 있을까. 그 여름밤, 어설픈 열세 살들이 태워 먹은 운동장 한가운데, 그 설익은 유년의 기억들이 거뭇한 그을음 되어 못다 쏘아 올린 불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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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불꽃놀이 멤버 중 하나였던 민이를 만났다. 우리 동네는 봄이 되면 길가에 벚꽃이 만발한다. 벚꽃 보러 한번 온다기에 그러라고 했는데 어제오늘 꽃송이가 탐스럽게 벌어져 마음이 조급했다. 꽃이 지기 전에 보러 오라 하니 일을 보고 점심 무렵 근처로 왔다. 민이는 주얼리를 만들고 판매도 한다. 민이가 가끔 메고 오는 가방 속에는 평소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보석들이 들어 있다. 날도 좋고 볕도 환하길래 착용샷 모델을 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예전에도 한 번 귀걸이 모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전혀 모르고 있던 진주 귀걸이의 세계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 색도,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보석이 어떤 옷에서 어떤 빛을 발하는지 처음 알고는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들은 언제 이렇게 자라고 자라 오늘의 봄까지 온 걸까. 차 한 잔을 하고 벚꽃길을 걸으며 문득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다.
너 불꽃놀이 기억나?
아, 너 모자!
민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열세 살로 돌아간 것처럼 배를 잡고 웃었다. 와, 나 진짜 억울했잖아! 난 불꽃놀이 안 했단 말이지! 근데 나를 쫓아와서 진짜 죽을 듯이 달렸잖아. 민이는 그때 잽싸게 운동 기구로 숨어 운동하는 척을 했다고. 예나 지금이나 참 똘똘하다. 나중에 관리인 아저씨가 플래시를 비추며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아, 왜 이러세요...' 하면서 제법 연기도 했단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운동장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때 나누었던 거다. 나는 뜯긴 모자를 보여 주며 의도치 않게 저질러 버린 잘못된 행동에 대해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이 없었다. 감히 학교 운동장에 숨어들어 불꽃놀이할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또 그 시절의 낭만이었는지 열대야를 피해 나온 동네 주민들도 우리들의 불꽃놀이를 흥미롭게 구경했다. 엄마 등에 업혀 나온 아기들도 좋아했다고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미화된 걸까.
야, 심지어 거긴 우리 학교도 아니었어.
어, 맞지. 너만 다른 학교였지.
내 말에 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다들 한 학교를 다니고 나만 다른 학교였는데 무슨 깡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학교까지 따라갔는지.
그때 좀 외로웠나 보다. 친구가 필요했던 거겠지. 학교도 다르고 소꿉놀이 시절 친구도 하나 없던 그때에 유쾌하고 다정한 민이가 좋아서 친해지고 싶었겠지.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실패한 불꽃놀이에 대한 기억을 안고, 그 여름밤부터 오늘의 봄까지.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더 재미난 일 많이 하자고 그런 말을 하며 헤어졌다. 가는 모습을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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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봄.
꽃이 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