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나만 아는 풀꽃 향기>를 읽고
우연히 만난 사람이 평생의 반려자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맡게 된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집어 든 책이 인생 최고의 책이 되기도 한다.
3시간 전쯤에 우연히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 끝나가는 시점이라 가볍게 한 시간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시인 나태주 선생의 새로 나온 책이었다.
짤막한 분량의 시들을 엮은 책인 줄 알았다.
어렵지 않은 글로 시를 쓰는 분이라 후루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잠 자기 전에 말랑말랑한 시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자고 싶었다.
그 말랑말랑한 글들이 내 꿈속에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함박눈이 되기도 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나만 아는 풀꽃 향기>라는 책이었다.
풀꽃 향기가 짙게 배어 나와서 아로마테라피 효과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였다.
몇 장을 넘기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은 그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종이책이었으면 책 표지도 살펴보고 목차도 좀 보면서 이게 어떤 책인지 미리 판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책을 대할 때는 그런 과정을 잘 거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저자가 누구인지 정도를 살펴볼 뿐이다.
책 제목이 맘에 들면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한다.
어차피 밀리의 서재라는 곳에 한 달 구독료를 지불한 상태이니 책값에 신경 쓸 일은 없다.
밀리의 서재에서 제공하는 책이라면 마음껏 볼 수 있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보고 싶으면 보고 말고 싶으면 말 수 있는 책.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에게 그저 그런 책 중의 한 권이었다.
가볍게 한 시간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연히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근 3시간 동안 정독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였고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돌기도 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일들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책은 시인 나태주 선생과 그의 딸 나민애 평론가의 글들을 모아서 엮었다.
나태주 선생의 결혼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딸 나민애를 낳아 키운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에 어엿하게 성장하여 문학평론가가 된 나민애가 아버지 나태주 선생을 회상하며 감사해하는 글들이 섞여 있다.
딸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딸의 성장 과정을 한 토막씩 그려내는 육아일기로 보일 것이고 부모 곁은 떠난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님 슬하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쓰는 사부곡처럼 보일 것이다.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3시간 가까이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나태주-나민애의 이야기들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태주 선생의 글 속에 들어가서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나의 딸을 보고 있었고, 내가 나민애 선생의 글 속에 들어가서 애달픈 마음으로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과 병약한 몸 때문에 딸아이에게 늘 미안했던 아버지였는데 딸은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딸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도 병약한 식구들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그 가정이라는 그림에서 하나라도 빠지거나 사라지면 그게 더 큰일이라고 여겼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방풍막이 되었고 딸아이는 아버지를 병풍으로 삼아 큰 바람이 몰아닥치는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닥칠 때 설마 방풍막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병풍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약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고 무릎 꿇어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딸은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려고, 그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거센 바람과 싸워 나갔다.
나도 이런 아버지, 이런 자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밤새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