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도량을 넓히려면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한다.
정말 책을 많이 읽으면 마음의 도량이 넓어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허구한 날 책을 읽었다.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지 그 내용을 거의 다 암기할 정도였다.
천자문 같은 경우는 4글자씩 묶인 시구로 되어 있으니 통째로 외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논어 같은 경우는 하도 많이 읽어서 그 책이 닳고 닳았을 것이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마음의 도량이 넓어졌을까?
다산 정약용 같은 경우는 마음의 도량이 넓어진 사람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불쌍한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생각해서 <목민심서>를 지었을 정도였으니까 분명히 마음의 도량이 넓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읽은 것 때문에 마음의 도량이 오히려 좁아진 사람들도 있다.
현종 때 예송논쟁을 벌였던 양반들이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송논쟁이란 임금이 죽었을 때 임금의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예절 논쟁이다.
아무리 어머니일지라도 자기 아들이 임금이었으면 임금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리 임금일지라도 어머니에게는 아들이니까 아들의 장례처럼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둘 다 꽤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읽은 책을 근거로 들면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같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펼쳤다.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너그럽게 양보도 하고 자기주장을 철회하기도 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잘했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았다.
상대방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까지도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였고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자기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 논쟁으로 인해 허다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아까운 손실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분명히 나보다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을 것 같은데 나보다 상황파악도 잘 못하는 것 같고 나보다 정세를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저기서 저런 말을 하는지, 왜 저런 고집을 피우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데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것 같다.
정말 국민이 원하는 것은 뒷전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 같다.
혹시 그런 지도자와 내가 허심탄회하게 속엣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아마 그럴 것이다.
“공부도 잘 못했으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뱁새가 황새의 마음을 알아?”
그러면 나는 나대로 대꾸할 것이다.
“공부도 잘 못한 나도 아는 것인데 공부를 많이 한 당신은 왜 모르냐? 어린아이도 알고 중졸도 알고 고졸도 아는데 석박사 학위를 가진 당신은 왜 모르냐?”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마음의 도량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식이 많아질 뿐이다.
하지만 지식이 많다고 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지식이 많다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또 별개이다.
식물학 박사라고 해도 등산로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보다 나물을 더 잘 아는 게 아니다.
물론 그 식물의 이름이나 무슨 과 무슨 종 무슨 속인지에 대한 족보는 줄줄 이 꿸 것이다.
그 나물에 들어 있는 영양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물들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고 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정하자.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마음의 도량이 넓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부족한 사람이고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지며 살자.
그것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