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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미 Apr 08. 2024

아이가 우는 걸 모른척하며 등을 돌린 날

18개월에 찾아온 아이와 나의 일춘기

우리 빵떡이(태명)는 매우 평범하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말은 약간 느린 것 같지만 소근육, 대근육 발달은 또 빠른 편이다. 아, 몸무게와 머리둘레는 평균 이상인데 엄마도 그러하니까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이처럼 아이가 평범하다라는 것은 다 큰 어른의 관점에서 혹여 아쉬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평범하다는 것이 가장 어렵고 감사한 일이라는 걸 알 것이다.


내가 빵떡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의외로 임신기간이었다. 몸이 무거워지고 2주에 한번씩 확인하는 초음파로 인해 뱃속에 생명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보이지도 않는 것(?)이 나의 정신적·신체적 컨디션을 여러모로 떨어뜨리기만 하니 그저 얼른 실물을 영접하고 싶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좋을 때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활발한 우리 빵떡이는 엄마 뱃속에서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그만 거꾸로 뱅글 돌아버려서 수술날짜를 잡았는데 효자라 진통도 없이 그저 약속한 날짜에 건강히 나와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술대에 누워서 내가 지금 여기 이 차가운데서 왜 이러고 있는거지라는 서러움이 몰려와 계속 눈물만 나왔다. 내 눈물을 멈추게 한 건 곧 나올 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책임감 이런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한마디였다. '자꾸 울면 마취 잘 안 들수도 있어요.' 헉 그것만은 절대 안된다. 눈물 뚝.


여하튼 빵떡이는 임신과 출산 기간 동안 별다른 이벤트 없이 평범하게 나왔고 -이 또한 얼마나 어렵고 감사한 일인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우선 내 눈앞에 보이니까 낯설고 강도높은 수많은 어려움들이 다소 상쇄되었다.

무엇보다 그 어렵다는 통잠도 50일부터 시작했고, 떼기 힘들다는 쪽쪽이도 100일 안에 뗐고(대신 그만큼 손을 빨았지만), 토해내기 일쑤라는 첫 이유식도 완밥으로 시작하였으며, 돌 지나 걷고 뛰며 어린이집 적응도 곧잘하는 등 자타공인 난이도 下 아기였다.


그리고 임신 다음으로 힘들었던 재접근기가 왔다.

재접근기란 통상적으로 생후 18개월부터 24개월까지 시기에 본인도 나름 컸다고 독립심을 가지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주 양육자와 떨어지는 걸 매우 불안해하는, 아기의 일(1)춘기같은 시기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특히 우리 집에서는 주 양육자가 절대적으로 엄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복직과 동시에 동글이가 약 6개월간 휴직을 하면서 문화센터를 다니고, 어린이집 적응기를 도맡았기에 아빠와의 유대감이 더 생겨있을 시기였는데도 18 소리 나오게 한다는 18개월의 빵떡이는 갑자기 엄마만을 찾아댔다.

자면서도 엄마의 인기척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출근은 세상 서럽고, 퇴근 후에는 무조건 본인 옆에 앉아있어야하고, 목욕과 취침은 당연히 엄마와, 외식도 엄마 무릎에서만, 어린이집에서 어쩜 이리 의젓하냐며 칭찬받고서는 그 사회생활의 고됨을 엄마에게 모두 쏟아내듯이 쉽게 짜증내고 과장되게 울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아이를 맘껏 예뻐하고 육아 난이도가 下라고 느꼈던 것은 육아가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 댁에 가면 맡기고 부부의 일과를 보내곤 했고 퇴근하면 잠깐 2~3시간 예뻐

하다가 같이 잠들면 되는 일이었는데 갑자기 모두와 나누었던 육아를 나 혼자 떠맡게 되니 당황스럽고 힘들고 점점 화가 났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이해를 바라겠냐 싶으면서도 거의 6개월간 혼자 재접근기를 떠안다보니 위로와 조언들도 고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발단은 내가 몸이 너무 안좋았던 날이었다. 먼저 침실에 들어갔는데 빵떡이는 아직 자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와 함께 하고 싶으니 계속 침대에 올려달라, 올려놓으면 내려달라 같이 나가자, 내려놓으면 다시 올려달라를 끝없이 반복했다. 남편은 어차피 본인이 개입해봤자 도움이 안되는 여러번의 상황을 겪은 터라 여느때처럼 내가 잘 어르고 달래서 마무리 했어야 했는데 나도 너무 화가나서 '어쩌라는거야, 너 마음대로 해!' 라며 크게 짜증을 냈고, 솔직히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화까지 다 몰아서 아이한테 풀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눈치 빠른 남편은 억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갔고, 그 역시 아이에게 '엄마가 아픈데 왜 자꾸 가서 괴롭히느냐.'라며 화를 냈고, 나는 거기에 또 화가 났지만 더 이상 내지를 힘이 남아있지 않아 아이의 서러운 울음을 뒤로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방문과 내 마음의 문 모두를 닫아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남편의 당직근무로 3일에 한번 아이와 나만 밤을 보내는 날이 돌아오고, 여느때와 같이 새벽에 깨서 밖에 나가자고 떼를 썼다. 평소에는 오선생님에 빙의하여 '우리 빵떡이가 나가고 싶었구나. 그치만 지금은 밤이라서 나갈 수가 없어. 다시 코 자고 아침에 같이 일어나자.'라며 마음읽기를 해주었는데

그날만은 해소되지 않은 앙금과 컨디션이 '떼쓰는 버릇을 고쳐줘야겠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어 우는 소리를 무시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예민한 재접근기에 내가 본인에게 등 돌리는걸 가장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나도 니가 내 말을 안들으면 등 돌릴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발악하듯 우는 아이의 울음을 계속 듣는 것이 괴로우면서도 참아내는 것이 양육자의 숙명이라는 생각 비슷한 것도 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복수 비슷한 못된 마음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쉽게 어르고 달래주지 않자 오랜시간 서럽게 울던 아이는 제풀에 지쳐 다시 누워 잠들었다. 본인도 나에게 등을 돌린 채로. 그제서야 나는 다시 돌아누워 매일 그러하듯 자는 아이의 얼굴에 후레쉬를 비추어 한참을 살펴보고 쓰다듬고 손도 잡고 뽀뽀도 하며 사랑을 나눠주고는, 때론 이런 훈육도 필요한 것이라며 자기위안 후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난 아이는 나와는 다르게 전날의 꽁함이나 뻘쭘함은 전혀 없이 언제나처럼 반도 못뜨는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았다. 그리고 아이가 일어난 자리에는 소변자국이 크게 남아있었다. 아이는 전날 터질 것 같이 부푼 기저귀가 불편해서 나를 깨워 밖에 나가자고 했던 것이었다.

전에도 종종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가 불편한지 체크해서 금방 알아채고 바꿔주었는데, 어제는 이상하고 쫌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당연한 것을 알아볼 생각도 못하고 너무도 뻔한 걸 놓쳐 아침에 이 사달을 만들었던 것이다.

전날밤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아이가 미웠던 날이었고, 다음날 아침은 살면서 내가 가장 싫었던 날이었다.


고기 구워먹는데 계속 매달려서 몇 점 먹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던 날,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다 했는데 내가 옆에 없다 울어서 약속을 취소했던 일, 몸이 안좋아 혼자 하루만 일찍 자겠다는데 이것도 어려운 건지 화가 났던 밤, 요즘 이래서 힘들다는 말에 곧 이때가 그리워질 거라는 위로 안되던 조언들,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고 칭찬 아닌 칭찬으로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던 날들 …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토록 맹목적인 사랑을 매일 온몸으로 퍼붓고 있는 아이에게 화풀이 할 일도 전혀 아니었기에, 내 자신이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인간으로서 기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욱 뻘쭘하게도 빵떡이는 자신의 두번째 생일날 신나게 촛불을 불고 케이크를 먹은 다음날부터 갑자기 마법에서 풀린 듯 '엄마 안농!'하고 출근하는 나를 쿨하게 보내주며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일춘기가 다소 어이없게 마무리 되었다.


살다보면 지나온 대부분의 고통들이 그때 그렇게까지 힘들일이었나하고 미화가 된다. 대부분 기억도 희미한 일들에 왜 그렇게 부질없는 마음을 썼는지 머쓱할 때가 많은데, 반대로 절대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들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나를 성장시켰다.

실습 끝나고 울면서 걷던 퇴근길이 절대적 동기부여가 되어 나의 현재 진로를 결정했고, 

첫 업무에서 낯설고 어려워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이해해보려 애쓰던 그 시간이 내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칭찬을 남겨주었고, 

빵떡이는 잊었을 그 날의 밤이 엄마로서 나의 태도를 다시 설계시켜주었다.


단언컨대,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에게 화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날밤 육아 시행착오에 대한 속죄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일춘기가 지난 빵떡이는 여전히 순탄하게 성장하고 있다. 

어금니가 나서 자다가 울기도 하고, 자동차와 비행기 구경에 빠져 하원은 한시간씩 걸리며, 노는데에 푹 빠져 자는 시간은 한시간 정도 늦춰졌으며, 밥은 여전히 잘 먹고,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는 데에 재미가 붙었다.

매일 하루에 한번은 황당하고, 세번은 어이없고, 열번은 웃는 날들이 반복된다. 그렇게 나도 아이도 같이 일춘기를 보내며 성장하고 있다. 부족한 엄마 키워주느라 애쓰는 아이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50일 기념으로 찍은 파이팅 사진. 앞으로도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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