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쓰는 부모일기]3. 시작은 했으나...
다큐와 버라이어티쇼 하나씩은 찍은 듯 험난했던 엄빠 인터뷰
그리하여 부모님 이야기 듣기의 시작은 '치매예방 프로젝트'로 제법 거창히 명명도 하였습니다. 아니, 사실은 부모님을 인터뷰 테이블로 초대하기 위한 명분이자 자구책이 필요했달까요?
그날도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계신 엄마 아빠를 불러서는, "아빠, 엄마. 제가 앞으로 간간이 뭘 여쭤볼 테니 그냥 편하게 생각되는 대로 답해주시면 돼요."라고 운을 뗐습니다. "뭘 물어? 뭔데?"(심드렁에 잠시 위축), "아니~ 별거 아니고 그냥 엄마 아빠 생각이나 옛날 기억이나 그런 거. 이렇게 맹숭맹숭 TV나 보시느니 가끔 제 질문에 답하고 그러다 보면 머리를 쓰게 되니 치매 예방도 되고 좋잖아요"
이렇게 거의 우격다짐으로, 엄마 아빠의 반신반의하는 호기심과 어리둥절이란 틈을 타 기습적으로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자, 아빠 먼저! 몸이 아플 땐 무슨 생각이 드세요?"... 침묵... (견뎌야 한다, 끄응) "빨리 나아야지.", "끝이에요?", "응", (당황하지 말고 자연스럽게라고 다짐하며)"어.. 그럼 다음. 지금 꼭 갖고 싶은 물건이 있나요?", "없어"(앗), "없어요? 어어... 그럼 지금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없어" (못 참고) "아, 아빠~ 대답이 너무 짧잖아요! 재미없어~" (여기서 불쑥 치고 들어오는 엄마의 습격) "야, 너네 아빤 평생을 말을 안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속이 터지지, 안 터지겠니? 그리고 없을 만도 해, 젊을 때 등산이며 낚시며 전국 안 다녀본 곳이 없을 걸? 혼자 아주 잘 다녀서 원도 없을 거야" (아빠는 침묵, 나는 좌불안석) "아니 엄마. 잠깐잠깐! 지금은 아빠 차례라고!!" (엄마의 멋쩍은 웃음+살짝 째려보는 눈초리를 견디며 다시 꿋꿋한 척) "아빠. 그럼 마지막! 역사 속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요?" "음... 글쎄, 생각이 안 나네" 으으으... 재미없어!!
휴.. 겨우 아빠와 5분 얘기했나 싶은데 심정적으론 한 50분짜리 다큐 한편 찍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지요. "자, 그럼 엄마 차례! 엄마는 아플 땐 무슨 생각이 들어요?" "사철 아픈데 뭘~ 안 아픈 데가 없어. 눈 때문에 짜증스럽고 죽겄어. 이 눈 때문에 아주... 80 넘으면 팍팍 더 늙는다는데 이러다 아예 안 보이면 어쩌나 걱정된다니까?" (엄마는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시거든요), "아휴, 엄마 힘들어 어째", "그러니까 말이다", (눈 얘기 한참) "응.. 그럼 엄마, 엄만 지금 꼭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요?" "음. 지금 딱 생각 안나는 거 보면 없는 거겠지?" "아~ 네. 그럼 지금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아, 있지. 나는 서유럽! 안 가봐서 꼭 가보고 싶어. 원래 oo랑 가기로 했었거든, 근데 이제 걱정되고 망설여진다니까? 어지럼증 올까 봐? 근데 가보고는 싶어, 죽기 전에 가봐야 쓰겠는디..." (여행 얘기 또 한참) "자, 자, 엄마. 그럼 이제 마지막! 엄마가 역사 속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흠. 이순신이라고 해~ 요즘 이순신 뜨니까. 근데 이게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을 댈 수 있어야 하는데 워낙에 괴상망측한 사람이 많으니까 대려야 댈 수가 없네. 안 그러니? 얘 얘, 세상에 ooo 봐라. 난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 (이후로도 한참 이어진 정치 얘기)
와... 엄마랑의 얘기는 역시나 끝도 없습니다. 15분 얘기했나 싶은데 한 150분짜리 버라이어티쇼는 찍은 느낌이랄까요. 두 분이 이렇게나 다르다니요. 발화량만 봐도 차이가 극명합니다. 말수 적은 아빠는 단답형, 말수 많은 엄마는 서술형에 확산형. 단답형은 간결한 대신 그것대로 답답함이 있고 서술형은 이해되는 게 많은 반면 그것대로 피곤함이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 한 스푼을 갖고 시작한 -'치매예방 프로젝트를' 가장한- '엄마 아빠 이야기 듣기'의 서막은 올랐더랬죠. 일단은 해보았단 시도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이후에 또 한다면 이런 것도 고려해봐야겠구나 싶은 팁이라면 팁도 생겼습니다.
ㆍ두 분 모두를 인터뷰한다면, 같이 한 자리에서 하는 게 나을지 따로따로 시간을 내는 게 나을지 생각해 보면 좋겠더라고요. 우리 부모님처럼 발화량에 차이가 있고 자칫 그 과정에서 두 분 사이의 분란(?)이 생길 여지가 있다면, 따로 뵈면서 차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반면 함께 진행할 때는 간접적으로나마 두 분이 서로의 생각을 들춰볼 수 있단 장점도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ㆍ예상과 다르게 빨리 끝나 버리거나 또는 더 오래 걸린 수 있는,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음에 먼저 열려 있어야 될 거 같습니다. 그러니 시작부터 여유로운 마음으로. '꼭 이 질문 5개는 하자'보다는 '된다면 5개는 해볼까' 정도의 마음으로요. 하기사 인생사 다 그렇지, 싶기도 하네요.
ㆍ복기하며 써보니 제가 한 질문들이 좀 뜬금없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맥락도 없이 그저 준비된 질문 리스트에서 대충 뽑아 하는 데 급급했던 거죠. 역시, 좋은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건 상호작용에서 파생되는 게 제일 좋을 거고요. 유연함이 필요한 거 같아요.
ㆍ적으면서 듣는 건 좀 한계가 있는 거 같습니다. 된다면 녹음이 더 나을 거 같았어요. 어쩌면 이때의 녹음으로 남겨둔 부모님의 육성 그대로가, 그 언젠가는 저에게 기쁨과 그리움이 되고 위안도 줄 수 있겠지요.
사실 전, 여러모로 부모님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건 솔직히 참 피곤한 일이란 걸 다시금 느꼈달까요? 이게 묘하게 긴장되고 부담도 됩디다. 아예 타인보다 더 어려운 측면이 있더란 말이죠. 아마도 가족이기에, 감정이 더 이입되어 그런 거 같다 추정도 해봅니다. 이를테면 엄마아빠의 서로에 대한 불만이 뭔지 알기에. 서유럽에 가고 싶으시단 바람을 알았으니 어쩐지 방법을 알아봐야나 싶기에. 그렇게 뭐 하나에도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서의 분리 혹은 외면이 쉽사리 안 되기에. 뭔가 불편한 게 있는데 말씀을 못하시는 건 아닌가 걱정까지 되기에 등등 말이에요.
아휴. 그래서 이렇게 한 번 하고 이내 녹다운이 된 저는, 이 날 부모님과 저녁까지 같이 먹는 걸 택하는 대신 서둘러 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쓰다 보니... 아니 이럴 거면 이런 거 안 하고 차라리 식사 한 번 더 같이 하고 오는 게 찐효도 아닐까 싶기도 한걸요?!?!
어렵네, 어려워요(ㅎㅎ;). 하여 이 프로젝트가 과연 얼마나 계속될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시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