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내가 꿈꾸는 것을 방해하는 생각들 없애기
‘하루는 내 람보르기니에 기름을 넣고 있는데, 한 10대가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며 부탁해왔다. 그 학생은 차를 보고 흥분하여 떠들어 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찍을 수 있을 때 많이 찍어 둬야겠어요. 전 이런 차 절대 못 살 테니까요.”
<부의 추월차선>의 저자 엠제이 드마코가 책에서 소개한 일화 중 하나입니다. 그 10대 학생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저 학생의 말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학생은 왜 자신의 삶을 그저 단정 지어 버린 걸까요?
저는 수학을 싫어하고 못했습니다. 못하니까 하기 싫고, 하기 싫어서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결국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시 정책의 힘을 빌려 ‘포기'하고 말았어요. 반면에 언어영역은 조금만 노력해도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잘하니까 더 관심이 가고, 노력하다 보니 꾸준히 1등급을 유지했어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 다른 건 어느 정도 해도 수학만큼은 절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는 다시는 잘해보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꾸준히 노력해봤더니 수학을 잘하게 됐더라'는 아름다운 결말이 나지 않아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업무에 필요할 때 정말 간단한 산수조차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자 함께 일하던 상사가 ‘은근 허당끼가 있네?’하며 핀잔을 준 적도 있어요. 다른 것들을 아무리 똑 부러지게 처리해도 간단한 산수 계산 앞에서 약해지는 제 모습이 싫었습니다. 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조차도 앞으로 숫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봐야 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날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제가 저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의외로 구조적 차별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책에 따르면 2008년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논문 ‘문화, 젠더, 수학'에서 국가의 성차별 수준과 15세 학생들의 수학 성적을 비교한 결과 성차별적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 여성들의 수학 성적이 더 낮았다고 해요. 책에서 언급된 또 다른 논문 ‘젠더와 직업 선택 과정: 편향된 자기 평가의 적용’에서는 여성이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문화적 고정관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능력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의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봐도 성차별은 피부로 느껴질 만큼 흔한 것이었습니다. 성차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다른 책을 따로 할애해서 써야 할 정도겠지만, 저는 구조적 차별로 인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차별한 결과에 주목해봤습니다. 차별과는 관계없이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어쩌면 그밖에 스스로 정의 내린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좁디좁은 세상에 갇혀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면? 존재하지도 않는 타인의 뾰족한 시선을 의식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옭아매어 두는 거라면? 내가 결론 내린 나 자신이 내 진짜 모습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그런 생각들이 수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려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으니까요. 무한한 가능성에 나를 풀어두었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너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해준 대로 스스로도 결론 내린 채 살지 않았다면, 어느 날 답답해서 찾아간 점집에서 말해준 것들을 말도 안 된다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믿어버리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요.
제가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한 것도 그 책을 읽었을 그즈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1km에 9~10분 정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뛰겠다고 나갔다가 결국 대부분 걸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달리기는 저에게 수학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어요. 마음을 비우고 ‘나이키 러닝 앱'을 켜서 초심자 코스를 들으며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습니다. 달리기는 즐거워야 한다며 가볍게 달리라더니 20분을 멈추지 않고 뛰게 만들더라고요. 달리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근육조차 없어 종아리에는 쥐가 나고 이 정도의 유산소 운동을 감당해본 적 없던 폐는 터질 것 같이 아팠어요. 그래도 그냥 매일 화를 내며 조금씩 달렸습니다. 화는 점점 사그라들고, 종아리는 단단해지고, 폐도 적응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제 3Km를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됐습니다. 기록은 6분~7분 정도 나와요.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는 기록이지만 1km도 걷뛰를 반복했던 저에겐 엄청난 기록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저의 모습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거죠. 저는 이제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요.
어쩌면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는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일 거예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습들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을 바꾸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바뀌게 될지도 몰라요.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되는 건데, 생각보다 우리 자아는 고집이 세서 그 믿음을 잘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긴 하죠. 저는 제가 단정 지었던 저의 모습에서 서서히 벗어나 제가 원하는 저의 모습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데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1. 일단 제가 그러기로 결정했고요 2. 제 안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잘못된 믿음을 찾아 제대로 마주 보고 힘을 못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나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듯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제가 매일 하는 건 이런 거예요. 일단 물리적으로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눈을 감고 편하게 앉아요. 그러지 않으면 저희 집 고양이가 어느 순간 다가와서 앉아있는 저에게 머리를 기댄다거나 꼬리로 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너무 시끄럽지 않은 이상 특정 소리가 들리는 건 괜찮은데, 물리적으로 닿는 경우는 피하는 게 좋아요. 처음엔 눈을 뜨고 있어도 돼요.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주변 환경, 주변에서 나는 소리 등을 인식해보고, 나도 모르게 몸에 들어가 있는 긴장을 점점 풀어줍니다. 몇 번 반복하다가 마지막 날숨에 함께 눈을 감아요. 그때부터 편하게 숨을 쉬면서 그냥 숨 쉬는 걸 느끼고 있어요. 만약 그냥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다양한 생각들이 하나둘 떠올라요. 어제 그 사람이 한 이야기, 지금 해야 하는 일, 아까 무슨 꿈을 꿨더라? 근데 예전에 그런 얘기도 들은 적 있었어, 아.. 나 며칠 전에 왜 그랬지, 등등. 그냥 그 생각들을 마치 TV를 보듯 지켜봐요. 생각보다 특정 생각들을 반복해서 붙잡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도 있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멀어져 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서 나의 현재에 집중해봅니다. '나는 왜 내가 이렇다고 한정 짓고 있을까?'라는 커다란 질문 하나를 떠올려봐요. 그럼 그것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데 그 생각들을 또다시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럼 생각보다 내가 단정 지었던 것들이 어린 시절의 사건이나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어릴 때 엄마가 나한테 그렇다고 말해서, 어디서 읽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등등 주로 바깥에 있는 목소리가 나의 믿음이 되어 강하게 자리 잡은 경우들이 있더라고요. 수학을 왜 못했을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처음 망친 수학 시험지를 차마 엄마한테 보여주지 못해 비 오는데 우산으로 쓰고 집에 오는 내가 있어요. 그 마음이 너무 안 좋고 슬퍼요. 엄마한테 혼도 나요. 엄마가 학원을 보냈는데 그 학원에서는 못하면 매를 맞았어요. 수학이 무섭고 싫어져요. 그냥 그런 사건들의 연속이 나를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네요. 재미를 붙이기보단 몰아붙여 강하게 공부해야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니 이해해요. 그냥 그래서 나는 수학이 싫어졌을 뿐인 거죠. 아마 다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도전하면 지금 내 삶에 필요한 것들 정도는 마스터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럼 지금의 나는 왜 부자가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나는 스스로를 부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결론지어 버렸던 것 같아요.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눈을 뜨면 시작되는 똑같은 하루, 달라지지 않은 상황들, 어제와 같은 걱정들, 보이지 않는 미래.. 어떤 새로운 삶을 생각하기보단 당장 심각하게 느껴지는 걱정거리들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빴어요. 정말 온갖 것들을 비교하게 되는 SNS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진 것보단 갖지 않은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삶의 모든 면이 조화로운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정말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의심을 품을 때까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져버렸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은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전까지 스스로에 대해 잘못 결론 내렸던 생각들을 마주하느라, 부자가 아닌 생활 방식들에서 하나씩 벗어나느라, 정말 하나도 몰랐던 것들에서 하나둘씩 알아가느라 보낸 시간들이 결코 쉽지는 않았어요.
나의 현재는 과거에 내가 했던 생각들이 만든 거래요. 내가 스스로 바라보는 내 모습들이 그대로 현실에 나타난 거라고요. 그럼 반대로,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그리는 내 모습을 매일매일 선명하게 그려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현실에 반영되고, 그럼 더 자신감이 생겨서 더 나은 나를 생각하고, 그럼 나는 더 더 나은 내 모습을 갖게 되는 거죠. 지금 당장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이에요. ‘저마다의 최선'이라는 말을 좋아해서 자주 사용하는데, 여럿 중 1등이 아니라 각자의 최선의 모습이 되는 거예요. 지구에 사는 사람 수만큼의 꿈이 있을 테니까요.
자신에 대하여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나를 ‘이렇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좋아하는 책 <태도에 관하여>에서 임경선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를 단정 짓지 말자구요. 아니면 나를 부자라고 단정 지어 버리던가요. 나를 내가 알던 사람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하고, 선택한 대로 조금씩 움직이면 돼요. 그리고 그 모든 여정에 매일 조금씩 나 자신으로 향하는 여행을 곁들여보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