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죽음
*경야(經夜):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관 옆에서 밤을 새워 지키는 일(표준국어대사전)
사람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시기는 다르다. 아버지는 20대에 처음으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목격했다고 하셨다. 친구를 잃은 남자와 택시에 동승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고. 죽음이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구나, 깨달았다고 하셨다. 난 아직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삶이 망가져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니,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나는 꽤나 엉망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죽음은 병사(病死)였다. 전래동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병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부모가 자식에게 읽어주는 것이 좀 충격적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배웠다. 오히려 글이 더 이해하기 쉬웠던 것 같다. 11살 무렵 처음 만난 죽음은 사고사(事故死). 당사자는 할아버지셨다.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인 나를 참 아끼셨었다. 새벽에 어렴풋이 어른들의 통화 내용을 듣고도, 아침에 처음 듣는 척 거짓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 챙겨주신 하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갔었다. 내가 울었던가, 많이 슬펐던가, 잘 모르겠다. 난생처음 보는 어른들의 눈물에 어리둥절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실제 죽음이 생소하기도 하고, 왜, 얼마나 슬픈 것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애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은 왜 슬플까. 좋은 것을 더 누리지 못하고 가는 것에 대한 연민, 다신 볼 수 없다는 그리움, 미래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데에 대한 안타까움, 죽음 전에 겪은 고통에 대한 이입, 나 역시 유한한 존재임을 재각인 하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이유는 다양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슬픈 가장 큰 이유는 망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불가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더 이상 그의 입에서 진심을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남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숙제가 주어지는 셈이다. 죽음은 이기적으로 수용된다. 아끼고 의지했던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보내는 것은 미안하고 아프다. 혼자 남겨지는 것은 두렵다. 그래서 슬프고 눈물이 난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쓰고 계신다. 늘 점잖고 여유 넘치시는 분, 현관을 들어서며 한 손을 들어 반가워요–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알게 되었다. 친인척들과 사회적인 시선에서 그는 또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는 걸.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전해 듣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있는 것과는 별개로, 나로서는 과거라는 벽돌들이 쌓여 완성된 할아버지를 알 수 없는 탓이다. 벽돌만 하나하나 살펴서는 어떤 모양의 벽이 완성되었는가 알 수 없다. 과거가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모양으로 벽돌을 쌓았는지, 그렇기에 그가 어떤 사람으로 우뚝 서있는지 본인에게 듣고 싶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듯,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할아버지를 잃은 경야에는 어떤 이유로 슬퍼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를 잘 모르고 보내는 데에 대한 슬픔을 알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지난밤에는 이미 땅에 묻힌 관이 아니라, 그의 기억 옆에 누워보았다. 할아버지는 평상에 누워 부채질을 하며, 내가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곤 하셨다. 내가 조금만 더 나이 들 때까지, 그렇게 종종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하고 소원해 본다. 영원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란 사실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첫 경야를 보냈다. 사랑하는 이를 알지 못하고 보내는 슬픔으로 날을 지새운, 첫 경야였다.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르고 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M으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