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뜻 찾기는 불가능하다
낯선 이의 말에는 숨은 뜻이 없다고 믿는다. 순진한 철학으로 보일 테지만, 나에게는 편견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같은 것이다. 게다가 성격도 화법도, 배경도 모르는 사람의 말에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짐작하여 관계 맺는 일은 피로함과 동시에 상대에게 무례한 일이 될 것이다. 친밀한 사람의 말 역시 숨은 뜻이 없다고 믿는다.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상대의 다른 뜻을 궁리하는 것을 어려워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솔직하다. 숨은 뜻이 무엇인가 고민해야 하는 사이는 오직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 정도이려나. 하지만 애매한 그들은 고민할 가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모두와 솔직하게, 1차원적으로 소통한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숨은 진심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 친구들 사이에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신뢰 게임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공식적으로 친구가 되려면 비밀을 공유해야 한다는 귀여운 원칙. 게임 페이지의 비밀번호를 공유하자는 양갈래 머리 소녀에게 선뜻 암호를 공유했고, 나는 그 친구가 비밀번호를 적어준 종이를 곱게 접어 소중히 여기곤 했다. 마치 그것이 우리의 우정인 것처럼. 내 계정의 설정이나 이름이 멋대로 바뀌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우리의 우정이 1주일 짜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난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눈물이 났다. 낮잠을 주무시던 아버지를 깨워 하소연했었다. 세상은 조금 그런 거라고, 나보다도 사람을 더 잘 믿는 아버지가 위로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쁜 꾀로 남을 속이는 것(표준대국어사 전)을 사기(詐欺, fraud)라고 한다. 그런데 꼭 나쁜 꾀가 있어야만 남을 속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기는, 어떤 배신은, 나쁜 뜻 없이도 성립된다. 그 어린 날의 양갈래 머리 소녀의 배신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냥 귀여운 장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어린 날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흘린 눈물이나 다친 마음을 취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인지 되묻지 않았고, 우리는 그대로 멀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믿은 데에는 후회가 없지만, 그 아이에게 진심을 말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은 후회된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 않은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
믿는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믿기로 했다면, 숨은 뜻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진심을 짐작하지 말고 묻는 것 역시 도리다. 매사문(每事問)-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시 물어보는 것, 지레짐작하지 않고 묻는 것. 나는 그것이 신뢰로 관계를 다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렸던 날, 양갈래 머리 소녀에게는 진심을 물을 용기가 없었다. 내 짐작이 맞을까 봐 겁이 났다. 어쩌면 나는 그냥 장난꾸러기 친구가 있었을 뿐이지, 배신당한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믿고 기다리고 물어볼 수 있는 용기가 충만하냐고 하면, 아직 단언할 때는 아닌 것 같다. 경험은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와 비슷한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나 상황들은 나에게 불행하고 배신당하는 미래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저 그것을 기정사실이라 믿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혹여 배신당하더라도, 믿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고마운 경험을 하고 나면 내가 옳다는 확신이 생긴다. 이렇게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지난 상처들은 가뿐하게 느껴질 수가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믿어보고, 기다리고, 진심을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신뢰하고 관계를 맺고 있을까? — 다음에 누군가를 만나면 묻고 싶은 질문이다.
- 사람과 관계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도망치려 분투하는 M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