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른왕자 Dec 18. 2023

사내를 지우지 않았다

내 나이 22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가난해도 좋다. 불꽃처럼 살면 될 일.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뜨거운 가슴과 몸부림만 남고 모오든 것들아, 가라!




연극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고민.


연극은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쏟아부었다.

너는 누구인가?
나와 너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뗄 수 있는가? 없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내가 알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규정할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가?
.......................................................?


찾고 싶었다.

해답은 가까이 오는 듯하다 더 멀리 튕겨져 나갔다.

생각과 고민은 더 복잡하게 얽히거나 뒤틀렸다.

해결되지 않았다.

연극은 계속되었고, 연극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

예술의 전당 야외 공연장.

<한 여름밤의 꿈> 무대로 손색이 없다.

풀벌레는 음향 담당, 달빛은 조명 담당, 나무가 관객이 되고...

티타니아와 연극 연습을 하기로 했다.

나는 요정의 왕 오베론.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사랑하지만 표현이 서투르다.

나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표현이 서투르다.

모두 다 서투르다.

달빛을 받으며 풀벌레의 심장이 되어 요정의 나라로 들어간다.


그날 그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

아베 코보의 <친구들>, 일본 작품.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욕심이 난다.

하지만 난 이 극을 이끌어 갈 자질과 능력이 있는가?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나요?


결국 무대에 올랐다. 나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형편없는 연기를 했고 배우로서 감당하기 힘든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들었어야만 했다.

듣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최선이라는 것,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공연이 끝나고 난 사내(역할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완전히 해당 캐릭터로 빙의해서

현실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꿈에서 사내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또 자책을 했다.

사내만, 사내만 생각했다.


결국, 연극과 이별했다.

꺼졌다.



솔직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해지는 법을 몰랐다.

연극을 함께 한 동료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그리고 사내에게도.


그것이 사내에게 미안하다.

아베 코보에게 죄송하다. 




그녀는 늘 칭찬해 주었고 감싸 주었다.

내 마음도, 내 고민도, 내 눈물도 모두 안아 주었다.

고마운 사람. 한결같았던 사람.

 

아베 코보는 날 부족하게 만들었고 겸손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날 충만하게 만들었고 당당하게 만들었다.

아베 코보는 결국 바닥까지 날 추락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바닥까지 손을 뻗어 날 끌어올렸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나의 스승.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나의 연인.




벌써  20년.

아직도 사내를 지우지 않았다.

사내의 대사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조금씩 이해해 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꼭 완벽한 사내를 만나리라!

언젠가는 꼭 사내가 되리라!


아베 코보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이건, 일종의 경고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