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장 분위기의 역사(1)

시(始) - 처음에는 어땠을까?

클래식 공연장 분위기의 역사라는 대단한 제목을 붙이고 글을 쓰려니 이걸 어느 시점부터 써야 하나 참 막막합니다. 이럴 때면 학교 다닐 때 서양음악사 시간에 좀 더 열심히 들을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네요.

그래도 오늘날 클래식 공연장의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일단 음악사적으로 "대중"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시기였던 르네상스 시대까지 올라가 보도록 하죠. 르네상스 음악이라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당시는 멜로디 하나로 부르던 음악들이 슬슬 서로 간의 화음을 맞추며 복잡하게 발전해 나가던 시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멜로디 하나의 음악을 단성음악Monophony이라고 하는데 천장이 높은 성당에서 들리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랬던 것을 여러 음악가들이 이런저런 실험들을 통해서 "대위법"이라는 걸 만들어내서 단성Mono이었던 것을 다성Poly으로 더 복잡한 음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던 세상이었으니 가장 멋진 음악은 당연히 신께 바쳐진 다성 성가곡들이었고요. 물론 세속적인 음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음악의 장대함에 비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청중들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장소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위치한 성당이었습니다.

단단한 돌벽과 높은 천장,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모자이크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곳곳에 나누어 배치된 성가대에서 울려 퍼지는 다성음악에 휩싸인 청중들은 아마 상당히 황홀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성당 건축의 구조가 아주 긴 잔향을 만들어 내기에 계속 중첩되는 다성음악의 매력은 더욱 빛났을 것입니다.




필자는 지난주에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탄생 5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팔레스트리나가 작곡한 미사곡 "파파 마르첼리 Papae Marcelli"를 가톨릭 이 솔리스티 합창단에서 베이스 2 파트로 연주했습니다. 1555년에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 단 22일 만에 돌아가신 교황 마르첼로 2세를 위해 1562년에 작곡한 미사곡인데 아주 아름다운 음악으로 유명합니다. 공연한 장소는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현대의 공연장은 이런 다성음악을 하기에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음악을 작곡한 팔레스트리나는 당연히 잔향이 긴 성당을 전제로 작곡을 했을 텐데 상대적으로 잔향시간이 짧은 현대의 공연장은 그 음악의 특성을 살리기에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대의 공연장들은 2초대의 잔향을 지향하는데 반해 팔레스트리나가 있었던 로마의 성당들은 10초 이상의 잔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니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네요. 다시 르네상스 음악의 청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많이 연주된 음악은 자연스럽게 교회음악이었고 청중들은 당연히 성당에서 그 음악들을 들었으며, 그것은 공연의 영역이 아닌 미사의 일부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오늘날처럼 감동받았다고 해서 박수를 치거나 음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야유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당시의 음악은 미사를 보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사에서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천상의 공간감을 선물하므로 미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스레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청중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었죠.


이 당시의 음악이 교회음악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음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많은 음악가들이 궁정에서 그들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궁정소속 음악가들은 하인의 신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고용주의 연회를 돕는 역할로서의 음악들을 주로 만들어 연주하는 것이 본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만든 음악을 듣는 청중은 당연히 왕족이나 귀족들이었겠죠? 교회음악이 미사를 돕는 보조적인 수단이었듯이 궁정음악은 연회를 돕는 보조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미사라는 것이 워낙 거룩하고 엄숙한 종교적인 의식이니 그곳에서의 청중들은 그 거룩함에 압도되어 어떤 소리도 내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오늘날에도 결혼식 같은 행사에 가보면 현악4중주단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는데 요새말로 브금(BGM; Back Ground Music)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당시라고 달랐을 것 같지는 않네요. 연회를 돕는 음악, 간혹 댄스파티라도 하게 되면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음악보다 연회가 우선이다 보니 음악은 감상을 위한 메인디쉬가 아닌 짜장면에 나오는 단무지 같았다고나 할까요? 없어도 되지만 없으면 뭔가 허전한.


물론 교회와 궁정 밖에도 음악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전문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교회음악가를 제외하고는 하인의 신분과 다름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음악이 주가 되어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음악보다는 미사가, 궁정에서도 역시 음악보다는 연회가 중심에 있다 보니 음악을 "감상"한다는 문화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나마 르네상스 시기 후반이었던 1500년대 말에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여러 아카데미아Accademia는 지식인들이 모여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문학과 철학, 음악이 주제가 되어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자신들이 연습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 음악을 철학이나 문학, 연극과 연관 지어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 역시 전문적인 음악감상만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한 여러 사례에 비추어 가장 현대의 음악회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사도, 연회도 그 중심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또한 토론과 연구를 위해서는 자연스레 연주되고 있는 음악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요.


이렇게 아직 현대적인 의미의 "음악회"의 형태와 완전히 동일한 그 무엇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를 잠깐 들여다보았습니다. 공연장, 청중, 음악가의 3요소라고 할만한 것이 전부 애매했던 시절이라 공연장의 분위기를 논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네요. 교회 안에서는 너무 엄숙했고, 연회에서는 너무 떠들썩했고, 아카데미아는 너무 소수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시기는 슬슬 음악이 미사와 연회를 제치고 중앙무대로 진출할 준비를 하던 시대였습니다. 음악가들의 지위 또한 극소수지만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1580년엔 플랑드르 학파의 마지막 거장이었던 오를란도 디 라쏘(Orlando di Lasso, 1532~1594)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로부터 "황제의 기사Signor Orlando di Lasso, Cavaliere Cesareo"(정식 작위명칭은 황제의 황금기사Eques auratus Caesaris)라는 명예귀족작위를 하사 받으며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귀족의 반열에 오른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인이 기능적으로 만드는 음악의 시대에서 음악이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며 그 의미를 인정받아 사회적으로도 음악가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와 더불어 음악의 지위도 상승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었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음악이 중앙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바로크 시대로 가 볼 것입니다. 전문적인 음악 공연장이 생기고 본격적으로 공연장, 청중, 음악가의 3요소가 만들어지는 시기를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들여다보기를 원했던 공연장의 분위기를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음 글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구독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천음악


최초로 귀족작위를 받은 음악가 오를란도 디 라쏘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작곡한 "성 베드로의 눈물Lagrime di San Pietro"를 추천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3주 전에 작곡을 완성한 마지막 작품으로 동시대의 이탈리아 시인이었던 루이지 탄실로(Luigi Tansillo, 1510~1568)의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부인하고 겪는 슬픔의 단계를 주제로 쓴 20편의 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한 편의 시를 가사로 작곡한 영적 마드리갈 영가(20곡) + 모테트(마지막 1곡) 장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핵폭탄을 발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6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필자 주)은 1949년 그의 저서 "이탈리아 마드리갈Italian Madrigal"에서 "이 작품은 아리오스토(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ivico Ariosto, 오를란도 디 라쏘와 동시대의 이탈리아 시인)와 타소(토르콰토 타쏘Torquato Tasso, 역시 동시대의 이탈리아 시인, 교황 클레멘트 8세로부터 계관시인의 대관식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며칠 전 사망함으로 무산됨; 필자 주)의 위대한 서사시 연가곡에 영적으로 대응하는 작품으로, 그 예술성, 규모, 금욕주의는 『음악적 헌정Musikalisches Opfer(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BWV1079)』과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역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BWV1080)』에 비견될 만한 노인의 작품이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Lagrime di San Pi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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