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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May 08. 2024

휘말린 날들

서보경_휘말린 날들


이 책은 감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염된’, 이라 쓰지 않는다. ‘감염한’, ‘감염한다’고 새로이 쓴다. <휘말린 날들>은 바이러스와 감염(/면역)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상식’에 대해 재검토하고, 다른 방향과 시선으로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주었으며, “감염-되다”에 ‘휘말리다’라는 중동태를 새로이 사용함으로서 HIV 바이러스와 인간의 관계와 동반에 대해 설명한다. 휘말림이라는 언어로 HIV/AIDS 역사와 운동, 감염은 새롭게 이야기되고,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감염은 서로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서로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감염 당사자만이 아닌 다른 관계와 방식 사이에서 ‘우리’와 ‘곁’이 생겨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휘말린 자들이다. HIV바이러스와 관련하여 먼저 휘말린, 그리하여 먼저 ‘앞줄’에 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낙인 받아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먼저 바이러스를 만나 뒷줄에 있는 이들에게 동료가 되어주는 이들이다. 지금껏 우리에게는 늘 그런 사람들이 있어왔다. 처음을 먼저, 힘껏 살아낸 사람들이. 당신의 인생 사방에 말이다. 한국의 HIV/AIDS 운동은 다중의 억압과 배제, 차별에 맞서온 운동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다중성을 다루기 위해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 이론, 개념, 태도와 연합해야 한다고 말하며 감염병은 의학과 공중보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학, 역사학, 철학, 퀴어 이론 등이 반드시 개입하여 엮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이 의제는 의료인들이 있는 단체에서 질병으로서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퀴어페미니스트 정체성으로서 이 의제는 나에게 나의 의제일 수도 있구나, 나의 의제이구나, 들어오게 되었기에 다중적인 의제이며, 그러기 위해 다양한 지식과 이론 또 현장의 경험들이 연대하고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HIV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역사가, 과거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 왔고 어떤 틀을 강고히 가져왔는지, 그리고 그 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이 책은 1장부터 에이즈 유행의 처음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성적 문란 서사 틀을 재검토하며 다루고 있다. 2장은 한국에서 에이즈와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앞에 ‘설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살펴본다. 왜, 누가 낙인찍히고 강제로 이름 불려야 했는지, 그것이 이 국가의 권력과 어떻게 연동되었는지, 어떻게 이런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데 커다란 몫으로 역할을 했는지. 3장은 감염임도 잘 치료받으면 얼마든지 ‘일반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 이미지에 담기지 않는, 감염 당사자의 생애사와 그들의 가족 및 친족의 인터뷰를 통해 어떤 박탈과 수치를 매일매일 끌어안고 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로 일어나는 의료 영역에서의 차별과 대응에 대해서는 이 책의 4장에서 다룬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이즈를 인권의 언어로 말하고자 한 사람들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계보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흔적들을 그러모았다. 후반부인 5장은 HIV 감염의 부정성에 큰 몫이고 행위당사자이기도 한 법의 문제를 다루고, 6장은 이 책에서 사용한 ‘휘말림’이란 중동태 문법을 자세히 한다. 사실 나도 이 책을 읽는 내내 ‘휘말림’과 특히 ‘감염-하다’에 익숙해지지 않기도 했다. 휘말림이란 표현에 박수를 치게 마음에 들었던 만큼 ‘하다’와 감염의 이어짐이 어색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감염은 내가 아닌 것에 물들면서, 휘말리면서 시작된다. 낙인이란 작동으로 경계를 공고하게 나누고 싶겠지만, 이미 그것은 그 경계가 모호하고 흐트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감염‘하여’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맞음이라고 했던 것들, 질서라는 것이 흐트러지는 것이며, 그것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 또 지금은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그 전과 다른 ‘지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7장의 ‘HIV와 에이즈의 미래’라는 제목처럼 우리는 어떤/어떻게 HIV와 함께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이 책은 HIV 감염이 만들어갈 미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과거를 새롭게 다시 알아가는 작업을 함으로서 이어질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단지 병이 완전히 없어지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비록 지금 당장 완치의 미래 혹은 없는 미래를 당겨오거나 만들지 못하더라도 부정성과 함께 현존하는 사회, HIV가 야기하는 문제나 현존 속에서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미래’를 그려보자고, 그려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코 사라지지 않아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말이다. 우리가 아직, 여전히 하지 못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그러한 미래는 에이즈의 과거가 가르쳐준 역사적 과오와 부정의를 인지하고, 불평등과 억압을 깨치며, 그동안 쌓여온 경험을 통해 만들어갈 수 있다. HIV가 있는 날들이 누구나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미래가 달려 있다.


내가 가지게 된 아픈 몸, 만성질환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내 질환 역시 나의 나의 면역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질환으로 ‘혐오’받거나 ‘차별’의 위치에 던져지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어떤 선택에 있어 나의 의지와 무관하여 불가 판정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나의 취약의 인식과 정도에 따라 달라질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만성질환인 HIV 감염은 같을 수 없는 위치에 놓여져 있는 것이 여전히 한국의 현실이다. 그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서 이 의제를 인권의 언어로 풀어내고 대응하는 이들이 있고, 법정장애인정운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결혼과 혈연만이 아닌 다른 ‘난잡한 돌봄’을 이어가고, 나와 곁에게 용기를 주면서 살아가는 것. 나는 이 책의 마지막이 다정한 질문을 건넨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을 ‘퀴어하기로’로서 살아가는 것과 우리가 어떤 변화를 “함께” 만들어야 하는지, ‘휘말린’ 당신은 어떤 생각이냐고. 지금 여기에 함께 “휘말린” 우리는 HIV에게 어떤 미래를 줄 수 있느냐고, 어떤 다른 미래가 주어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HIV 감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감염은 공동체, 우리의 일이다.


<휘말린 날들>, 서보경,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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