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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May 15. 2024

일인칭 가난

안온_일인칭 가난


지나간 ‘불온’에 대해 쓴 ‘안온’의 <일인칭 가난>을 읽었다. 이 얇은 책 속에 가난의 다양한 얼굴일 수 있는 일들이 한 사람의 생에 지독히도 흘러서 쉬이 읽기 힘들기도 했지만 몰입이 깊기도 했다. 안온 작가가 ‘세상에는 빈곤 계측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일인분짜리가 아닌 일인칭의 가난으로 나의 지난날들이 그의 삶과 어떤 면에선 포개어지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서로 다른 모양을 지닌 채 가난을 이어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아빠 ‘덕분에’ 나는 한 시절 의료비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 살았다. 진료비 1000원, 약 값 500원은 병원 가는 문턱의 고민을 덜게 해주는 아주 큰 지점이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첫 임금을 벌기 시작했을 땐 내 임금이 어딘가로 뺏길지 모르는 위협이 있었고, 우리는 그런 지원 속에서도 가난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책 속에서 나오는 ‘작디 작아서 신발장 바로 앞이 주방이었다’는 그런 작은 크기일 공간이 현재 나의 집이다. 임대 아파트 당첨만을 기다리는 이 시대 가난한 청년들이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임금노동을 하고 열심히 삶을 살아간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작은 이 공간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늘 인지하고 있다. 당장 일을 못하게 되어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이 그나마 덜한 적은 월세 금액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그것은 내가 공간에 갖는 큰 안정감이며 위로감이다. 언젠가 쓴 적 있는데 임대 아파트는커녕 수급자까지는 되지 못한 가난 속에서 제대로 된 욕실도 없이 바깥 수도에서 찬물로 혹은 전기 기기로 물을 데우며 씻던 시절로 대부분의 십대 시절을 보냈었기에, 어떤 이에게는 집을 떠올릴 때 당연한 모양으로 생각나는 집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생활을 길게 보냈었기에, 그러나 지금도 가난하기에, 가난의 꼬리표가 묻는 임대 아파트는 가난한 청년에게 더 가난해지지 않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저자의 삶과 달랐던 것은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다행이었지 싶은 것은 나의 가난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난을 원한 적 없으나, 가난으로부터 온 것들 역시 원한 적 없으나, 가난을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것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3시절 내야할 분납금을 내지 못해 혹시 졸업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마음 졸였던 것을 결코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 고만고만한 사정들 속에서 서로의 가난을 낙인찍을 필요가 없어 어쩌면 너무나 다행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가난의 시절은 환영할 수 없어서 나는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었다.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가난이었으나, 언제나 그 현재보다 과거가 낫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는 아빠가 일찍 죽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부채감과 무거운 어깨의 증거였다.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질 혹은 네가 무슨 가난을, 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난무할 ‘가난’에 대해서 나는 더 많이 쓰여 지고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만들어지는, 그리고 가난이 만들어내는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더 많이 이야기되고, 나의 가난을 절절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만들기 위해서.


<일인칭 가난>, 안온 지음, 마티


p9-10 내가 늘 '제일'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부와 빈곤이 수직적 관계이듯, 어떤 빈곤과 그보다 더한 빈곤도 그러하다.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 빈곤의 순위는 뒤바뀐다.

 그 지점은 가난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몇 살에 그런 가난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비/수급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수급 여부, 그러니까 "제도권 안에 들어온 사람들하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나는 제도권 안에 있었기에 제도권 밖, 즉 수급 밖의 가난이 어떠한지는 멀리서 보고 들었으되 그 사정에 훤하지 못하다. 그래서 '가난'을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심히 망설였지만, 그래도 썼다.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일인칭의 가난을 쓸 테니까. 세상에는 빈곤 계측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p16-17 의료비 지원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비롯한 빈곤 계층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책이다. “세금이나 사회보험에 의해 재원이 뒷받침되는 보건의료 체계··· 에서는 원칙적으로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원칙은 부자들로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부를 재분배하는 기능을 하며, 공공 병원과 클리닉(의원)을 계급 사회 속에서 비교적 계급 격차가 적은 몇 안 되는 공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p34-35 한편, 이런 식으로 가난을 '수급'이라는 제도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기 때문이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p36 나는 늘 선택을 계산했다.


p74 침묵했더라도 나는 떨었을 것이다. 분해서. 떨리더라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엔 많다. 젠더와 가난이 그렇다. 내 입술에 이소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걸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소호의 시집이 나오는 족족 읽었다. 아니, 섭취했던 것 같다. 가끔은 신물이 올라왔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제사는 꼭 지내야 해서 소고기 한 줌을 사던 엄마의 옆에 서서 느꼈던 체증이 다시 느껴져서.


p87 열음: 그니까. 근데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잖아. 내가 너무 가난해서 남들의 아픔을 우습게 여기는 건 아닐까.

나: 안 그래야지.

열음: 안 그래야지 하다가도 통장을 보면 내가 제일 아픈 건 어떡해?

나: 어쩌긴. 좆됐다 생각해야지.

열음: 우린 좆도 없는데 늘 좆되는구나. 내일 언니 일 몇 시라고?

나: 아침 10시부터 애들 수업.

열음: 지금 새벽 2신데? 니 뭐해?

나: 대학원 과제.

열음: 좆됐네.


p116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링크는 수 년 전 썼던 글: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8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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