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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Feb 22. 2023

우연히 만났지만, 모른 척했다

사춘기를 함께 보낸 스페인 친구 두 명

그때 그 시절엔 문자 한 통을 아끼기 위해, 미리 약속을 잡거나 친구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때론 우리만의 신호를 만들기도 했다. 전화를 걸어 신호가 한번 울리면 끊는다. 부재중 전화 1통을 남기면 YES, 2통을 남기면 NO라는 답과 함께. 공원 벤츠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친구 집에 가서 게임을 하곤 했다. 그렇게 나의 사춘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아마 17년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SNS가 발달되지 않았던 때라 몇몇 친구들이 생각나지만, 그들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치는 것 밖에 없다. 그 어려운 걸 해냈지만, 우린 서로 모른 척했다.


중학교 4학년 (한국과 달리 스페인에서는 중학교가 4학년까지 있다). 만으로 16살이 되는 굉장히 어중간한 나이었던 그때, 나에겐 든든한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라라는 굉장히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배울 점이 참 많은 여자 아이였다. 내가 30년 가까이를 스페인에서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사람이 그녀이다. 라라와 함께 있으면 내가 될 수 있었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는 아드리안이라는 키가 아주 큰, 조금 엉뚱한 면을 가진, 나를 늘 웃게 만들어준 남자아이였다. 우리 셋은 늘 함께 다녔다.


그렇게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왜 인사조차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라라와는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면서 같은 미래를 꿈꿨었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녀에게 연락을 받았다. 수능을 보지 않겠다고. 그런 선택에 놀라고 당황하기도 하면서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떠났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아드리안과의 이별은 그전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4년을 마치는 마지막 날, 그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고 사라졌다.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글과 함께 마지막에는 그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중학교 다니는 동안 늘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순간을 생각해 왔었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하필 제일 친한 친구에게서 받는 고백인 걸까? 고등학교에 다니는 저 오빠에게 받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 뒤로 우리 관계는 달라졌다. 친구로 지내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와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가 베푸는 작은 호의까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린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언제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전, 아드리안을 만났다. 아주 우연히. 달달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멈춘 버거킹에서. 내가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낯익어서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쳤다.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렸지만 그의 모습은 그때와 똑같았다.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했지만, 눈을 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 순간이 어색해졌다. 안경도 쓰고 달라진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을까? 일하는 도중 손님과 얘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자신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아이스크림만 손에 쥐고 나왔다. 먼저 반갑게 인사해주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고 그런 나의 행동이 후회됐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드리안을 보고 나니, 라라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그의 연락처인 이메일을 찾아 연락을 해 보았다. 아직까지 그 이메일을 쓰고 있지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다음에, 다시 우연히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용기 내어 먼저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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