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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Mar 29. 2023

육아가 버겁게 느껴진다면

순한 아이를 원했건만

나에겐 작은 습관이 있다. 그건 바로, 힘들 일을 겪어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할 때 글을 쓰는 것이다. 아픔, 슬픔, 분노 또는 다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하려고 하면 연필과 노트를 찾는다. 종이에 생각을 필터 없이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쯤, 많이 힘들었다.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인지 오늘 유독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아기가 눕기만 하면 울고 보채서 나도 모르게 ‘왜 그러는 거야!’라고 큰소리를 냈다. 놀란 아이는 우는 걸 잠깐 멈추었다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때, 체력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한계가 왔었는지 순간 나쁜 생각을 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우는 아기를 두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핸드폰 볼륨을 크게 올렸다. 그렇게 하면 조금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두고 온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게 아닌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는지,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있는지, 정말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아이의 미소를 보면 그 순간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는 걸. 주변 반응에 따라 미소를 짓는 '사회적 미소'가 나타나는 시기는 보통 생후 1개월이다. 우리 아이는 60일이 넘도록 미소 한번 지어주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보며 배시시 잘 웃는 것 같은데 왜 우리 아이는 웃지 않는 것일까? 초조한 마음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행히 병원에서는 눈을 잘 마주친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럼 왜 웃지 않는 걸까요?' 

'그건 아마 조금 과묵한 아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의사는 poco simpático라고 하셨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조금 불친절한 아이. 



임신했을 때 엄마는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둘째였던 나는 굉장히 순한 기질을 가진 아이였다고 한다(크면서 역변했지만...). 별로 울지도 않고, 신생아 때부터 잠도 너무 잘 자서 살아있는지 확인하려고 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신다. 그래서였을까? 아이가 태어나면 다른 걸 몰라도 나를 닮아 잠 하나는 잘 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이람. 100일의 기적은커녕 19개월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새벽에 일어나 울곤 한다. 


그렇게 예민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첫 1년 동안 무언가 몸에 닿는 느낌도 굉장히 싫어했다.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하는 시간만 되면 목소리가 쉴 정도로 울어 돼서 그 시간만 되면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등센서 하나는 야무지게 작동했다. 눕히기만 하면 울었다. 그런 아이를 젖과 쪽쪽이로 달래 보려고 애썼지만 그마저도 거부했다. 아이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품에 안고 둥가둥가 흔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아이와 씨름하고 나면 몸이 힘이 다 빠져나가 점점 더 무기력 해져 갔다. 불안함에 시달리고, 육아가 버겁게만 느껴져만 갔다.



몸과 마음이 지쳐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지만,
하루는 지나고 또 지나가더라. 




일주일 후면 아이는 19개월이 된다. 요즘에도 새벽에 종종 깨서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느라 바쁘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소리 지르고 몸을 비꼬아 어른 두 명이서 낑낑 되는 날도 많다. 고집까지 생겨 자신이 원하는 데로 해주지 않으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밥을 안 먹는다고 징징,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생떼, 나가자고 짜증, 안 들어오겠다고 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마음은 훨씬 더 편안해졌다. 


이건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순간부터였다. 사실 처음에는 다른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를 참 많이 했다. '저 아이는 웃는데, 저 아이는 뒤집기 하는데, 저 아이는 참 순한데.' 이렇게 계속 비교하다 보니, 아이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의 기질을 알고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까다롭고 예민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공감 능력이 높은 아이였다. 과묵한 아이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사실 장난기가 가득했다. 불친절한 아이라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지 조금 느렸을 뿐.


육아는 마라톤과 비슷하다. 완주하려면 너무 빨리 뛰어도 너무 느리게 걸어가기만 해도 안된다.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 속도만 유지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아니다. 상황에 따라 조금 더 빠르게, 또는 더 천천히 가야 할 때가 있으니까. 목표만 보고 달려가다가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속도를 낮추고 조금 더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비로소 옆에 있던 아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육아가 버겁게만 느껴진다면, 속도를 조금 줄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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