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익산 백제 미륵사 - 백제 최대의 사찰

[백제 문화유산 박물지]

익산 미륵사


안개 낀 백제 미륵사 터 모습 ⓒ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아카이브

백제의 대표 사찰 미륵사다. 지금의 미륵사는 1300년 전의 찬란한 영광을 뒤로한 채 조용히 터만을 남기고 있다. 미륵사 터를 처음 밟으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부지에 감탄하게 된다. 미륵사지는 세로 450m, 가로 27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축구장의 규모가 120m * 80m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부지만 보더라도 그 당시 얼마나 웅장한 사찰이었을지 실감케 한다.


남측에서 바라 본, 미륵사 터의 항공 사진. 사진 속 산이 미륵산(용화산)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콘텐츠기록관리시스템


창건 설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세 줄의 짧은 향가를 들으니 어렴풋 기억나는 설화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서동설화다.

서동설화는 ‘서동(맛동)'이라는 백제의 한 남자가 아이들에게 민망한 노래로 부르게 만들어, 결국에는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까지 하게 됐다는 설화다.


정부 공식 무왕의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


미륵사와 서동설화가 무슨 연관이냐고?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600-641) 때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설화 속 ‘서동’이 바로 백제 무왕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삼국유사 <기이> 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여차저차 결혼을 하게 된) 어느날 무왕과 선화공주는 용화산(미륵사 뒤에 있는 산, 현재는 미륵산이라고 부른다.) 사자사(寺)에 있다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이름 없는 한 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났다. 이에 무왕과 선화공주는 수레를 멈추고 미륵삼존에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범상치 않은 사건을 경험한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라고 무왕에게 요청했다. 무왕은 부인의 요청에 따라 절을 짓기로 결정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어떻게 메울지 물었다. 지명법사는 신령스러운 힘으로 단 하룻밤만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꿔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사는 신비한 힘으로 메워진 못 위에 세워지게 되고, 미륵보살의 3대(三大) 법회(法會)를 나타내기 위해 전(殿, 건물) ⋅ 탑(塔) ⋅ 낭무(廊廡, 회랑)를 미륵사 내에 각각 세 군데에 세우게 된다.


서동설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삼국유사의 기록 덕분에 미륵사는 현대까지도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져 왔다.



무왕 왕비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금제사리봉영기 ⓒ국립중앙박물관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9년, 미륵사의 서쪽 탑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석탑의 기둥석 안에서 탑을 제작할 때 봉안한 사리장엄구가 온전하게 발견되어 세간을 놀래켰다. 무려 1300년 전 기록이 현대로 이어지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사리장엄'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舍利)를 위엄있고 엄숙하게 장식하는 행위와 함께, 사리 그리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용기, 탑 안으로 들어가는 공양구를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양구를 가리킬 때에는 보다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금제사리봉영기’이다. 이 유물은 글자 193자가 새겨져 있는 일종의 기록문인데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 글귀가 있어 ‘사리봉영기’라고 부른다. 금제사리봉영기는 금으로 만든 얇은 판이다. 앞·뒷면에는 글자를 음각으로 새겼고, 붉은 색 먹으로 글자를 칠하여 돋보이게 만들었다.



기둥석 안에서 잠들어 있던 사리장엄구가 130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순간 ⓒ국가문화유산포털


글로 기록된 내용 중 왕후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백제 황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선인을 심으시어 금생(지금 사는 세상)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중요한 일을 맡길만한 인재라는 뜻의 비유)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기부)하여 가람(사찰)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음력 1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좌평’은 백제의 16관등 중 제1등으로 현재로 치면 국무위원에 해당하는 상당히 높은 관직이다. ‘사택적덕’은 사람의 이름으로, ‘사택씨’ 혹은 줄여서 ‘사씨’라고 부른다. 백제의 유력한 8 가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성씨이기도 하다.


금제사리봉영기에 기록대로라면 무왕의 부인은 신라 선화공주가 아니다. 백제를 대표할만큼 규모가 크고 중요한 사찰을 건립하면서 사리장엄에 거짓이나 왜곡된 정보를 담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사택적덕이라는 고위 관료의 딸이 무왕의 부인이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또한 왕비가 재물을 기부하여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도 명확하게 적혀 있다.



정부 공식 선화공주의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무왕의 이야기는 정말 전설에 불과한 걸까? 나는 여기서 문화유산에 즐겁게 만나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두고 싶다.


나라 간 정세라는 것이 고금을 떠나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친선 관계를 가져가기도 한다.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 535년 기사를 보면 신라가 백제의 영토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은 오히려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시집보내 소비(小妃)로 만들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536년 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한다.


백제 성왕은 왕실 간의 결혼을 통해 신라로부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자신은 공격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50여 년 전 선대에서 정략 결혼을 통해 신라의 군사적 압박을 누그러뜨린 사례가 있었기 무왕 대에도 정략 결혼을 활용하지 말란 법이 없다. 무왕도 성왕처럼 결혼을 통해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또한 무왕에게 여러 왕비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인 추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에는 왕에게 한 명의 부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인, 중부인, 소부인 등 왕비가 여러 명 있기도 했고, 무왕이 궁남지에서 후비(嬪御)와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는 삼국사기 속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지만, 사택씨 왕비와 선화공주 모두 무왕의 부인이었다는 가설도 세워볼 수 있겠다.



미륵 신앙의 구현

미륵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구원을 바라는 미륵신앙과 관련이 깊은 절이다. 미륵삼부경(『미륵상생경』 · 『미륵성불경』 ·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미륵이 인간이 사는 세계에 현신한다. 지상에 내려온 미륵이 용화수(龍華樹)라는 나무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끝내면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미륵이 도래한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라 부른다.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미륵불이고,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털


미륵사 뒷편에 위치한 산을 현재는 미륵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옛 책에 따르면 이전의 이름은 ‘용화산(龍華山)’이었다.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듯, 미륵사도 용화산 아래에 배치한 것이다.백제가 온갖 공을 들인 자신들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찰에 ‘미륵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미륵신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륵사 금당 터 Ⓒ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미륵사가 창건된 639년은 백제로서는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무왕이 즉위하면서 신라를 공격해 옛 땅을 일부 되찾고, 국력을 조금씩 회복하기는 했지만,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이 재위 2년만에 죽고, 이미 수도를 두 번이나 옮긴 상황은 나라 전체에 불안감을 퍼뜨리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세는 국왕, 귀족, 백성할 것 없이 모두가 더더욱 미륵에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재밌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미륵사의 금당 지하마다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지하 공간이 발견되었다. 비슷한 사례로는 경주 감은사를 들 수 있다. 감은사의 금당에서도 지하 공간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라고 삼국유사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신앙적인 혹은 신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륵사 금당의 지하 공간도, 미륵사가 세워진 그 전설처럼 미륵이 다시 한 번  나타나 백제를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미륵사의 특이한 사찰 배치

미륵사 배치도 Ⓒ출처 미상


미륵사는 전통적인 백제식 가람 배치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람 배치는 사찰 건물이 배치된 형식을 말하는데,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기 보다는 나라별, 종파별, 지역별로 조금씩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는 탑 하나에, 금당(불상을 모신 건물) 하나를 설치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미륵사는 하나의 사찰 안에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배치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미륵사가 사찰을 3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배치한 것은 미륵이 이 땅에 하생하여 세 번의 설법을 거쳐 모든 중생을 구제 한다는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박물관에서 추측, 재현한 과거 미륵사의 모습 ⓒ박배민


일반적인 사찰과 다른 형식을 띤 탓에 미륵사는 사찰을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운영했다. 1탑과 1금당을 한 세트로 하여  원(院) 이라 부르고, 각 원을 동원, 중원, 서원이라 했다. 삼원은 복도(회랑)로 구분되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미륵사의 동측 석탑(사진 왼쪽)과 서측 석탑(우측) Ⓒ공공누리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였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보이는데 습기를 염두에 둔 공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이 세워졌고, 중원에는 양 탑보다 더 높은 목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목탑의 지하 2m까지 판축다짐으로 기초를 만든 것을 확인했다.


미륵사는 사찰의 핵심인 금당과 탑을 세 배로 늘려 설치할 만큼의 중요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위상과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미륵사의 이러한 가람 배치는 비슷한 시대의 백제 사찰인 왕흥사나 정림사은 물론 신라 사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로, 대단히 특이하고 연구 가치가 높은 사례이다.



백제 멸망 이후의 미륵사

통일신라 대에 조성된 당간지주. 지주 높이만 4.5m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미륵사가 조성된 것은 639년,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 경이니, 미륵사는 대략 20년 간 호국사찰의 역할을 수행한 중요 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이후에는 기록과 유물 출토를 통해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719년 9월 기사를 보면 금마면 미륵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에서 미륵은 미륵사를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륵사 탑에 벼락이 내리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조선 태종 대(태종 7년 12월 2일), 미륵사가 여러 지역의 자복사찰(여러 사찰 중,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정 또는 건립한 사찰)을 정할 때 (지금은 터만 남은) 봉화 태자사, 고성 법천사 등과 함께 지정된 것을 보면 미륵사는 조선 초까지는 나름 명망 있게 유지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로는 명확한 기록을 확인하기 어려운데, 1738년 조선의 학자 강후진이 익산의 백제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기록을 남긴 「유금마성기」를 통해 이미 폐허된 것을 학인할 수 있다. 태종 이후로 과도하게 큰 사찰의 규모와 불교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려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더해져 자연스럽게 쇠퇴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성 북쪽 산을 따라 오른쪽으로 10여 리를 가니 미륵산 서쪽 기슭에 옛 미륵사 터가 있다.”
自城北循山之右 行十餘里至彌勒山西麓 有古彌勒寺基(『와유록』 「유금마성기」.





나오며

목탑 터 기단 내외부 토층을 조사한 모습 ⓒ문화재청


백제 미륵사 터에 대한 발굴 작업은 1966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고 수차례 이루어졌다. 80년대부터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전면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1993년 미륵사지 동쪽 석탑이 복원되었고, 유구가 전체적으로 정비되어 사찰의 규모 또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을 통해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사용된 건물터에서 온돌이 발견되면서 한반도의 온돌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 2022년에는 목탑 터 발굴을 통해, 목탑 기단 지하에 지반 침하를 막고, 배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쌓은 석축이 확인하는 등 구체적인 축조 기법에 대한 성과를 올렸다.


백제는 자신들의 역사상 최대 사찰인 미륵사를 세우기 위해 건축, 공예, 미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장인만 불러 모았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이 장인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미륵사는 백제의 종교적 구심적이자 당대의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사찰이었다.





글: 박배민 (urang.kr)

작가의 이전글 [논어와 보원사지 5층 석탑] 나만의 길 걷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