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유산 박물지]
700년 역사를 가진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부여. 부여 왕궁으로 짐작되는 관북리 유적과 금강 사이에는 부소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사비백제 시기엔 부소산성 일대를 사비성 혹은 소부리성으로 불렀던 것 같지만, 현재는 위치한 산의 이름인 부소산에 따라 부소산성이라고 부른다.
백제 성왕(538년, 재위 16년)이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을 건설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처음부터 맨 땅에 산성을 쌓은 것은 아니고, 이미 동성왕(500, 재위22년)을 전후하여 부소산에 작은 산성이 존재했고, 무왕 6년(605) 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소산성은 사비시대의 핵심 산성으로, 백제의 몰락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이어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낙화암 - 삼천궁녀의 전설은 정말일까?
사자루 - 정지원명 불상과 의친왕의 현판
삼충사 - 진심으로 백제를 생각한 세 명의 충신
영일루 - 백제 왕이 일출을 맞이했던 자리
서복사 터 - 강당이 없는 특이한 사찰?
부소산성의 성곽 - 판축 기법으로 쌓은 부소산성
군창 터 - 백제 때부터 사용된 군량미 창고
삼천궁녀 전설로 유명한 낙화암부터 이야기해 보자. 부소산성은 산성 그 자체보다는 낙화암으로 더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신라의 100여 개 성을 빼앗았지만 결국 향락에 빠져 나라를 내팽개친다. 왕이 술과 잔치에 미쳐 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신라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한다. 결국 백제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의자왕의 후궁과 궁녀들은 적군에 사로잡혀 모욕당할 수 없다며 부소산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강 속으로 투신해 자결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낙화암 삼천궁녀 전설이다.
부소산성 내에 있는 고란사 법당에도 삼천궁녀가 투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3명의 일본 소녀가 유학 왔다는 내용까지 벽화로 담겨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설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 한국전통문화대 이동주 교수 등 역사학계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깎아내리고, 조선에 대한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트린 내용이라고 말한다.
지난 2022년 5월, 부여군은 심각한 역사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백제사 전문가 40여 명과 함께 2년 6개월에 걸쳐 <신편 사비백제사>를 출간했다. 부여군은 이 3권의 책이 사비백제를 승자의 시선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아(해발 106m)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사자루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달 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다는 곳이다. ‘달을 보낸다’는 낭만적인 이름이다.
사자루가 있던 곳에서는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출토되었다. 불상이 출토된 배경은 이렇다. 사자루는 원래 임천면(부여군 남부에 위치한 면) 관아 정문으로 있던 ‘배산루(背山樓)’라는 건물인데, 1919년 부여군수 ‘김창수’가 송월대로 배산루를 옮겨 지었다. 이때 땅을 고르다가 이 금동 불상을 발견한 것이다.
‘정지원명 불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불상의 광배에 적힌 명문을 통해 이 불상의 제작 배경도 알 수 있는 소중한 백제 문화재이다. “정지원이 (먼저) 세상을 뜬 아내 ‘조사’를 위하여 삼가 불상을 만들었으니, 하루빨리 삼도*를 떠나게 해 주십시오!”
사자루 현판은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백마장강(白馬長江) 현판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2002년 의친왕의 현판에서 글자 하나를 빼고 새 걸로 복원해 교체했다. 기존 현판에 있는 ‘이강공(李堈公)의 공(公)’이라는 직함 표현이 일본 왕실에서 내려준 것이기 일제의 잔재라는 문제 제기 때문이었다. 현재 기존 현판은 부소산성에서 볼 순 없고, 정림사지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악인이 죽으면 간다는 지옥도 · 아귀도 · 축생도)
부소산 동남쪽에 위치한 삼충사는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면 금방 만날 수 있다. 삼충사는 절이 아닌 사당인데,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성충은 좌평*으로 지내며 의자왕에게 직언하다 옥에 갇히게 됐는데, 이때 단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흥수는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자고 했던 인물이다. 영화 ‘황산벌’로도 유명한 계백은 결사대 5천 명과 나당연합군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계백과 결사대는 대군과 싸운 첫 네 번은 모두 승리했지만,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면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매년 10월에는 백제문화제를 통해 제향식을 거행하며 그들의 고귀한 충정을 기리기도 한다.
삼충사는 일제강점기와 연관된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일제 말기에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삼충사 부지에 6만 5,000여 평 규모의 '부여신궁'을 건설하려 했다. 부여신궁은 도쿄 신궁에 버금가는 규모로 남산신궁보다 격이 훨씬 높게 지으려 했다고 한다. 현재 체육관을 포함시킨 대전공설운동장의 규모고 4만 5,000평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결국 '황민화 정책'을 강화하려는 일제에 의해 부여의 여러 유적들이 훼손되었고, 일본인과 친일파에 의한 땅 투기로 인해 땅값이 폭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패배로 인해 신궁 건설 공사는 중단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주민들이 이 공사장을 파괴하였다. 이후 1957년에 해당 부지에 삼충사를 재건하였다.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삼충사는 57년 건물을 1981년에 다시 지은 모습이다.
* (16관등 중 제1등. 백제 최고위 관료)
** (위치는 충북 옥천, 충남 금산, 전북 완주 등 의견이 분분하다. 금산군 진산면이 유력하다.)
부소산성의 가장 동쪽 산봉우리. 2층 누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63여 리(약 25km) 밖에 있는 계룡산 연천봉 뒤에서 올라오는 해를 맞이하며 나랏일을 계획했다고 전해지는 영일루다. 영일루가 있던 곳은 계룡산 쪽에서 뜨는 해를 맞이했다는 영일대가 있던 터다.
영일루는 부여 홍산현* 관아의 문루였다. 영일루 이전 이름은 ‘집홍정’이었다. 1964년 홍산 군수 정몽화가 영일대 터에 문루를 옮겨놓고 영일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영일루의 안쪽에는 ‘寅賓出日(인빈출일)’이라고 적힌 현판이 있는데,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 (옥산면, 홍산면, 남면, 내산면, 구룡면, 외산면을 아우르며 1914년까지 있던 옛 마을.)
부소산성 서쪽 중턱에 절터가 하나 있다. 서복사(西覆寺) 터다. 문헌상으로는 서복사에 대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름 역시 절과 함께 사라져 원래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임시로 지은 것이다.
서복사는 해방 전인 1942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절의 건물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렬로 배치된 것을 확인했다. 북쪽의 금당(불상을 모신 건물)을 시작으로 목탑을 지나 최남단의 중문 순으로 기단의 높이가 낮아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특이할 점은 서복사가 백제 왕실이나 귀족의 원당*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승려가 공부하는 건물인 ‘강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백제의 사비 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과 근거리에 위치해 있고, 금동 허리띠처럼 최고위 계층만 사용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된 것이 핵심 근거이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문헌상 기록이 없지만, 이 사찰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백제시대 사찰이라는 것이다. 유물 조사에서 백제시대 이외의 유물이 전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듯하다.
*(願堂,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
산성을 만드는 방식 중 '판축'*이라는 기법이 있다. 자갈과 진흙을 번갈아 쌓고 단단히 다져서 마치 여러 장의 떡을 쌓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백제는 토성을 쌓을 때 이렇게 나무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같은 곳에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로 보강하여 산성이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만들었다. 부소산성은 백제 시절 이후에도 계속 쌓아 나갔다. 신라시대에는 백제 시기보다 축소하여 개조했는데. 이에 따라 부소산성이 이중 구조 성곽이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산성 중에는 백제시대에 해당하는 것은 길이가 약 2.5km, 넓이는 5~6m, 높이는 3m 정도이다.
금강에 가까운 북쪽에는 북문과 함께 물이 드나드는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동문 터에서는 철로 만든 커다란 자물쇠가 발굴돼, 문 터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 (版널 판 / 築 쌓을 축)
군창 터는 부소산성 내에서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불에 탄 쌀, 콩, 보리 등이 발견되어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로 추측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곡식은 백제시대가 아닌 조선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ㅁ’자 모양으로 배치된 4동의 건물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측 창고의 경우 길이가 50여m나 될 정도로 규모가 꽤나 컸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면서도, 한 나라의 마지막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문화재는 백제의 번영과 몰락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성곽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북나성, 동나성, 청산성, 청마산성과 함께 사비백제의 도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2012
신명섭, “’일제잔재' 논란 부소산성 사자루 현판교체”, 2002. 11. 19.
조재근, “일제 ‘신궁’이 들어설 뻔한 부여”, 2019. 7. 13.
열린관광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문화유산포털
우리역사넷 ‘부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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