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맬러리의 이야기
* 영화를 보기 전, 흥미를 돋우는 워밍업용 글입니다. 소개를 위해 아주 간략한 줄거리만 포함하고 있을 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아무것도 보지 말라
지난해 4월, 전 세계의 극장은 기대와 설렘에 가득 찬 사람들로 붐볐다. 어벤저스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인 엔드게임을 보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히어로들이 등장해 최종 빌런인 타노스와 싸우는 장면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한국에는 유독 인원수가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많은데, 어벤저스를 보고 있자니 왠지 그들이 떠올랐다. 아이돌 그룹을 보며 인터넷 유저들이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 중 하나가 ‘이 많은 멤버 중 적어도 한 명은 네 타입이겠지.’이다.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멤버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두면 그만큼 팬들도 다양하게 확보할 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영웅들도 참 많다 보니 그중 하나는 취향을 저격할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 드는 히어로가 등장하는 데다가 잠시 각박한 현실을 떠날 수 있게끔 화려한 액션과 진짜 같은 CG가 더해져 눈까지 즐겁다면 그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여곡절이 있지만 권선징악이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마지막에는 강한 빌런을 무너뜨리는 쾌감까지 선사한다는 점도 한몫한다. 퍽퍽한 고구마를 잔뜩 먹다가 사이다 한 사발을 들이켠 것 같은 시원함이랄까.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이런 전개라면 수많은 팬들의 열광을 불러오는 것이 아주 당연할 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영화는 이렇다. 빌런이 등장한다면 반드시 그 악당을 무찌를 히어로가 함께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려는 <버드 박스>에는 히어로가 없다. 그저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올 뿐이다. 분명 무시무시한 빌런은 있지만 이 존재를 막아줄 슈트 입은 영웅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괴물이 있는데 영웅이 없다는 사실은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일반적인 재난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보통의 재난 영화는 특정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계기가 비교적 명확하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가 퍼지는 내용이 주제라면 어쩌다 그런 바이러스가 생겨난 것인지, 어떤 루트로 퍼져나간 것인지가 확실하게 언급된다. 천재지변에 관한 영화도 그렇다. 사건에 대한 설명과 그에 따른 결과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버드 박스>에 등장하는 이상 현상은 그 누구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저게 왜 생겨난 거야? 그래서 저게 뭔데?’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게 만든다.
이런 설정 덕분에 판타지 요소 속에서 현실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히어로가 없을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런 맥락에서 <버드 박스>는 판타지이면서도 우리의 현실과 닮아 낯익게 느껴진다. 묘하게 현실 같다는 이런 점 때문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나 보다.
“쳐다보기만 해도 위험에 빠지는 상황이라면 그 존재가 눈에 보이는 것이 더 두려울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두려울까?” 아마 대다수가 후자를 고를 것이다.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피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언제 나를 죽일지 모르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볼 수 없다면 당연히 더욱 큰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들을 구해줄 히어로도 없으면서 <버드 박스>에는 그런 괴물이 등장한다.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이상한 무언가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존재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음으로 이끈다. 비말이 튀면 전염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무서운데 쳐다만 봐도 죽게 만드는 무언가라니...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다.
뉴스에서는 이를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보도한다. 그러나 정신병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갑작스럽게 차에 뛰어들거나,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행동들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아주 슬픈 표정을 짓고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죽게 되는 상황이라면, 대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버드 박스>는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어떤 목소리로 영화의 포문을 연다. 안전하게 모여 살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말과 그곳에 합류하려면 강을 따라 내려와야 하며, 아이들이 있을 경우 그 여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전하는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린 이후에는 주인공 맬러리가 두 아이에게 경고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아이들의 이름은 걸 그리고 보이.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냥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있도록 붙여둔 별명 같은 것이다. 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는지는 영화 속 맬러리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지금 여행을 갈 건데 아주 힘든 여행이 될 거야. 아주 오래 여행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 계속 조심하기 쉽지 않을 거야. 조용히 있기는 더 어렵겠지만 두 가지 다 해야 해. 눈가리개를 절대로, 절대로 벗으면 안 돼. 보면 너희들은 죽게 돼. 알겠니?”
다섯 살 아이들에게 하는 말치고는 다소 강한 어조로 느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길고 긴 강을 따라 꼬박 이틀을 내려가야 안전한 장소로 들어갈 수 있는 맬러리의 입장에서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고였다. 그렇게 영화는 본격적인 스토리 시작의 신호탄을 쏘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의 상황부터 아이 둘과 남겨지게 된 맬러리의 현재 모습을 번갈아가며 전개한다. 이런 전개 방식 덕분에 현재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나름의 재미도 쏠쏠하다.
현재 시점에서 맬러리와 아이들은 곧 급류와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때 셋 중 누군가는 눈을 뜨고 노를 저을 방향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에 부딪혀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과연 맬러리 일행은 무사히 급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포함된 감상평을 보고 싶으시다면 2편을 참고해주세요:)
영화를 감상한 이후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