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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Jul 19. 2021

어른이 된 성냥팔이 소녀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에게 온기를.



 나는 어른이다. 누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거쳐서 어른이 됐다. 그런데 가끔, 아니 자주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른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어느 한편은 자라지 못한 채 차갑고 시리게 방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햇빛을 받고 자라야 하는 식물이 그늘 아래에만 있어서 제대로 크지 못한 것처럼, 성장하지 못한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깊은 어둠과 차디찬 온도 탓에 다가가 열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 마음은 일상에서 나를 자주 괴롭혔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수군거리면 그것이 나를 향한 비난처럼 보였다. 누군가 큰 소리를 내거나 손짓을 크게 하면 그것들이 나에게 화살로 날아와 박힐 것 같은 위압감에 내 심장은 빠르게 요동쳤다. 직장에서 실수하기라도 하면 내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탄로 날까 봐 늘 불안하기도 했다. 그 실수가 마치 내 인생의 결말 같았다.


행복이 찾아오면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까 봐 애써 외면하는 때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좋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항상 밀어냈다. 애써 찾은 평정심을 누군가 찾아와 헤집어 놓는 것이 싫었다. 내 속의 어둠을 알게 된 그 사람이 차가운 표정을 머금은 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그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돈도 내 발목을 붙잡는 존재였다. 지금은 나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되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언제든 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의식주 외에는 돈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돈이 줄어들면 불안했고, 늘어나면 언제 잃을지 몰라 또 불안해졌다. 내 삶은 늘 형체 없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숨이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뒷동산에 올랐다. 그날은 유독 스스로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무에 기대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난 왜 이런 걸까.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때 아주 따뜻한 빛이 파묻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꼭 햇살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안녕?”

따사로운 햇살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구야?”

경계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물었다. 그랬더니 마음을 녹여버리듯 편안함을 주는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나는 빛이야. 늘 너를 지켜봐 왔어. 항상 말을 걸었는데, 너에게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려서 아쉬웠거든. 아무도 없는 고요한 이곳에 오니까 드디어 너에게 닿았나 보구나!”


어차피 보는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잠시 그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왜 나한테 말을 걸었어?”


 “네 마음에 빛이 닿지 않는 차갑고 어두운 공간이 보였어. 성장하지 못한 그 마음이 네가 어른이 되지 못하게 막고 있단다. 내 빛을 그곳에 나눠주고 싶었어.”

나를 꿰뚫어 보는 빛의 말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뭐든지 털어놔도 이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나는 사실... 보잘것없는 곳에서 태어나 불쌍하게 자랐어.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살았지만 말이야. 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불쌍한 것 같아. 내 삶이 참 가여워.”


그 말을 마치자 빛은 더욱 강하게 빛나며 말했다.

 “너의 공간을 내게 열어줘서 고마워. 그곳에 내 빛을 보내줄게. 오늘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엇이 너를 그렇게 쫓아오는지 살펴보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강한 빛이 머리 위에 쏟아지면서 너무 밝은 탓에 점점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뜨니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문으로 다가가 손을 뻗자 차가운 문고리가 닿았다. 하지만 이내 밝은 빛이 그곳을 비춰주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얻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깊은 어둠과 고요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빛이 함께 들어와 웅크리고 있는 가녀린 소녀를 비춰주었다. 성냥을 들고 있는 작은 소녀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시절 해결 받지 못했던 감정의 덩어리들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너였구나... 저건 과거의 나야. 나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 모두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따뜻한 음식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해의 마지막 날, 그날은 내게 가장 춥고 아팠던 날이었지.”

아픈 감정이 담긴 말들이 튀어나와 공기가 얼어붙자 빛은 나를 더욱 따뜻하게 감싸며 주변을 녹여주었다. 난 숨을 고르고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헐떡이는 엄마 신발을 신고 성냥을 팔러 나왔지만 결국은 한 개비도 팔지 못했어. 게다가 신발도 잃어버려서 그 추운 날 밤을 꽁꽁 얼어붙은 맨발로 다녀야 했지.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어. 그곳엔 추위를 막아줄 난로도, 어른도 없었거든. 아빠는 나를 때리곤 했어. 엄마는 그 속에서 날 지켜줄 힘이 없었고. 날 더 아프고 춥게 만들었던 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었지. 그냥 모든 게 이 세상에 태어난 내 잘못인 것 같았어."


빛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야,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들었겠구나. 너에겐 아무 잘못도 없어. 아픈 환경도, 추운 날씨도 모두 네 탓이 아니란다. 그것들은 너를 정의할 수 없지. 넌 그 자체로 소중해. 보석에 진흙이 묻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듯 말이야. 네가 걸어가며 보게 될 수많은 풍경 중에서 그 시기에는 골짜기를 지나갔던 거란다. 그 진흙은 닦아낼 수 있고, 그 골짜기는 벗어날 수 있어.”


나는 여전히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닦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도 내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 내가 소중하다고, 너는 이렇게 살다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어. 너를 그 당시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니야, 차라리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날, 그대로 할머니 품으로 갔다면 더 편했을지도 몰라...”


빛은 마치 따스하게 미소를 품은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야, 그날 나는 너에게서 살고 싶은 사람에게 보이는 강한 마음을 보았단다. 그래서 그곳을 비춰주었지. 가장 춥고 아팠던 그날은 네가  인생을 얻은 빛나는 날이었어. 이제 너에겐 그날들을 살아갈 자격도, 힘도 충분하단다. 지나간 것들이  곁에 머물  있어도  이상 너를   없다는  오늘  네가 알게  거야.”


빛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다시 뒷동산의 나무 아래로 데려다주었다. 빛 때문인지 눈물 자국이 모두 말라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하루를 되짚어보며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뜨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성냥을 하나씩 불태우며 신기루를 보았던 그날이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른의 모습인 나는 그때의 추웠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옷차림은 전혀 달랐다. 난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고, 따뜻한 옷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넉넉한 돈도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그 거리는 여전히 춥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추위에 떨었던 탓일까.


옷을 더 단단히 여미고 걷다가, 문득 내가 죽어가던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왠지 과거의 내가 여전히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이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밤은 깊어가고 계속해서 길을 헤매던 때, 저 멀리서 강한 빛이 보였다. 나는 빛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소녀가 웅크린 채 꽁꽁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손에는 불이 꺼졌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성냥들이 들려있었다. 그 미약한 열기라도 느끼고 싶었는지 잔뜩 웅크린 소녀에게서 체온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보였다. 그때에서야 빛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 살고 싶었구나.’


빠르게 코트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준 뒤, 안아 들어 따뜻한 숙소로 들어갔다. 우선 이불을 덮고 장작을 때어서 몸을 녹여주었다. 정신이 들었는지 소녀가 눈을 떴다. 나는 빛이 내게 말을 걸었던 것처럼 똑같이 인사했다.


 “안녕?”

 그날 밤 나는 소녀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며 빛이 건넸던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말들을 해주었다.


 “나는 빛나는 너를 발견하고, 도와주러 온 어른이야. 오늘 너는 새로운 인생을 얻게 된 거란다. 아프고 추워서 죽을 뻔했던 날이 아니라, 다시 살게 된 따뜻한 날로 기억해주길 바라. 너는 분명 멋진 어른이 될 거거든.”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그런 어른으로 자랄 수 있냐는 말에 나는 확신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가 이런 친절을 받아도 될까요?”

소녀의 물음에 나는 그 작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당연하지. 넌 그럴 가치가 충분한 사람이니까. 네가 가난해도, 아픔이 많아도, 차가워도 넌 여전히 빛나고 있단다.”

어른이 된 나는 과거의 나를 품어주며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우리 주변으로 반짝이는 빛이 흘렀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작은 소녀도, 빛도 사라져 있었다. 내 마음 한편에 있던 그곳의 어둠과 차가움도 사라져 있었다. 내게는 추위에 익숙해져 버린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소녀에게 건넸던 확신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도 남았다. 나는 어른이 될 것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느꼈다.


 ‘나에겐 진흙을 털어낼 힘이 있어. 나는 이미 골짜기를 지나왔고 이제 내 풍경은 달라졌어. 이제 나는 힘이 없던 그때의 소녀가 아니야.’


빛이 해주었던 말을 곱씹으며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며 어른이 된 소녀를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그 햇살이 이번엔 당신의 창을 두드리며 인사한다.

 “안녕? 누구에게나 마음 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어. 어른이 된 너에겐 그 아이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단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그 어둠을 함께 비춰줄게. 소중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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