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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ilorjeong Apr 12. 2023

What's In Sailor's bag

요트 타러 가는 여자의 가방에 비키니가 들었을까?


 제 취미는 요트 세일링이에요.


 본캐보다도 부캐의 위상이 드높아진 요즘 서로의 취미 또는 취향에 대해 관심 갖고 공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취미 대화가 시작되면 우선 나는 위 한 문장을 내뱉고, 장황하게 설명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당신의 상상을 깨부술 마음의 준비다. 취미가 요트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아마도 비키니를 입고 샴페인을 마시며 선상파티를 즐기다가 뜨거운 햇살에 익은 몸을 식히고자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에 퐁당 뛰어들기도 하는 유유자적한 그림을 떠올릴 것이다. 요트에 호화, 럭셔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은 처음 시작한 2008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실제로 나의 경우 입사지원서에 취미를 요트로 썼다가 처음 배치된 팀에서 재벌집 낙하산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었다.


 안타깝게도 내 취미 요트와 위의 아름다운 그림 간의 간극은 매우 크다. 물론 럭셔리하거나 또는 럭셔리하지 않더라도 자유롭고 유유자적한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몰두해 있는 요트는 레이싱 요트, 즉 바다 위에서 요트를 타고 순위를 겨루는 세일링이고 올림픽 종목으로도 채택되어 있는 진짜 스포츠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시즌에는 거의 매 주말 전국 각지로 요트를 타기 위해 짐을 싸는데 가방 안에 비키니, 샴페인, 태닝 로션과 같은 아이템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 세일러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우선 복장부터 세팅해 보자.


 클립이 달린 모자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기 일쑤이다)

 선글라스 (편광렌즈가 좋대요)

 얼굴 가리기용 버프 (피부로 바람을 느끼는 프로 선수들은 안 쓴다. 난 동호인이니까 쓴다)

 개인 부력용 기구 (즉, 구명조끼)

 바람막이 (고어텍스가 좋아요)

 슈트 또는 방수바지 (1~2인승 딩기 세일링은 슈트를, 4인승 이상 킬보트 세일링에선 방수바지를 입는다)

 보트 슈즈 (미끄럼 방지 특화)

 세일링 장갑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 엄지 검지 끝이 잘려나가 있는 것이 포인트)

 

 이걸 다 입으면 대략 이런 모습이 된다. 상상만 하던 간극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왼] 5월의 세일링 복장. 출항하면 바람막이를 껴입는다.  [오] 4월 초 세일링 복장 있고 배 작업중인 모습. 소금물에 절여진 신발이 포인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 아이템들은 모두 전문 세일링 브랜드를 써야 한다. 요트는 스쿠버 다이빙이나 서핑처럼 물에 아주 들어가는 것도 아니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을 수도 있고 또 바람 잔잔한 날에는 물 한 방울 몸에 묻히지 않고 뜨거운 태양만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수도 있는 희한한 (그래서 재밌는) 스포츠이다. 그리고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요트니까 당연히 바닷바람을 견뎌내야 한다. 결국 통풍이 잘되고 덥지 않되, 바람과 추위는 막아줄 수 있는 다기능성을 요한다. 모자는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끈과 클립이 달려있어야 하고, 장갑은 세일링 중에도 발생하는 매듭 등의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 검지와 엄지가 뚫려있어야 한다. 이런 아이템들을 세일링 브랜드가 아니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왼] 세일링용 장갑. 매듭 등의 작업 용이성을 위해 엄지 검지가 뚫려있다. [오] 끈과 클립이 달려있는 세일링 모자.

 추가적으로 백탁이 심한 선크림 (세일링 하면 기본적으로 하루 5시간 이상 해에 노출된다. 백탁으로 얼굴이 허예지도록 바르면 기분상 덜 타는 것 같다), 변화무쌍한 바다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옷가지 (반팔부터 플리스, 맨투맨까지 다양하게 챙겨간다. 배 위에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젤리 (당떨어졌을때 나의 최애 간식템. 초콜릿은 녹아서 안된다. 개인적으로 하리보보다 트롤리가 더 자극적이어서 좋아한다), 샤워도구와 수건, 여분의 속옷 (언제 얼마만큼 젖거나 땀을 흘릴지 모른다) 정도가 있다.

 

 여기까지가 50리터짜리 더플백에 항상 챙기고 다니는 세일링 아이템들이다. 제대로 한다면 요트의 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각종 공구들이 추가되어야 하지만 자칫 요트가 더 멀게 느껴질까 봐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 장비가 많이 필요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일컬어 장비병이 있다고 하는데 세일링이야 말로 장비병의 끝판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소소한 아이템들 뿐 아니라 요트까지도 장비니까. 럭셔리 요트는 아니지만 나의 시선에서는 레이싱 요트와 고기능성의 세일링 아이템이 그나름의 멋으로 느껴진다. 열심히 벌어 하나씩 장비를 갖추어나가는 재미도 취미 요트의 매력 중 한 가지이다. 학생 때는 모자 하나에도 기뻐했고, 지금은 고어텍스 바람막이와 바지를 사 입고 좀 더 따뜻한 세일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최종 종착지인 요트를 개인 장비로 갖출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자 다짐한다. 이렇게 세일링이 내 삶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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