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zeros?
멘붕의 시간을 뒤로하고 시간은 잘만 갔다. 주재원 비자 신청은 회사와 연계된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했는데, 작성해야 하는 서류와 첨부해야 하는 서류의 양이 많아서 몹시 귀찮았다. 미국에 있는 남편이 직접 준비해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영문 이력서나 재직 증명서 등), 내가 남편 대신 주민센터에서 발급해야 하는 서류들(가족관계 증명서나 기본증명서 등)은 주민센터에 30분은 넘게 앉아서 이것저것 발급받아 준비했다.
미국 비자 규격에 맞는 사진을 제출해야 해서 아이들 비자용 사진을 찍었다. 사진관에 두 명을 동시에 데리고 가기에 너무 번거로워서 번갈아가며 데려가 사진을 찍었다. 친정엄마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여권이 없는 둘째의 여권 신청도 했다.
내 몫의 서류는 내가 작성해야 했다. SNS 계정 아이디까지 종류별로 적으라고 해서 프라이버시에 위협을 느끼며 나의 소셜미디어 인생을 강제로 돌아봐야 했다. 지난 5년간 페이스북은 거의 안 했는데 써야 돼 말아야 돼..? 유튜브 하려고 생각만 하고 안 하길 잘했다... 이런 생각 하면서 아주 착실하게 작성했다.
주재원 비자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E2 비자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배우자가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조금 기대가 됐다. 가서 어떤 종류든지 경력을 만들어와야겠다는 막연한 다짐도 해봤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 비자 인터뷰 신청이 한없이 느려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잠깐 희망을 품어봤다. 가야 되는 날짜가 조금이라도 늦춰졌으면 좋겠다는 희망.
발령은 1월 예정이었고, 비자 인터뷰는 12월 9일에 했는데, 그때까지도 미국에 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해외 이사업체 선정도 안 했고, 집 정리도 안 했다. 비자를 못 받으면 못 가니까...?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미국 가서 읽힐 아이의 한글책이나 주문했다. 지금 돌아보니, 계속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남편은 출장에서 돌아와 코로나 시국에 송별회 따위를 하며 대부분 늦게 왔기 때문에 평일에는 육아를 하고, 주말에는 뻗어있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자 인터뷰 당일, 친정 엄마에게 아이 둘을 다 맡기고 남편과 둘이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이었다. 2018년 5월에 육아 시작 이후로 남편이랑 둘이 있어본 게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좀 일찍 가야 한다고 해서 8시 30분쯤에 도착했다. 회사원들이 바쁘게 이동하는 광화문역에 내려서 kt 빌딩을 지나 위협스럽게 서 있는 경찰청 버스 무리를 지나면 미국 대사관 입구가 나온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 마스크를 벗고 여권 정보를 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을 맡기고 번호표를 받았다. 우리가 첫 번째 타임인 9시로 인터뷰 예약을 해서 그런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2층으로 올라가라고 안내를 받고 올라갔더니,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최소 20명은 되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아... 안에서 다 대기하고 계셨구나...
인터뷰하기 전, 아주 불친절한 직원이 지문을 모두 찍으라고 해 나의 열 손가락 지문 정보를 미국 정부에 넘겼다.
코로나 때문에 띄엄띄엄 줄을 서고 기다렸다. 담당 변호사가 아이는 데려오지 말라고 해서 안 데려왔는데, 아이 셋을 데리고 와서 앉아있는 가족이 보였다. 아이가 있으면 인터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스크를 못 쓰는 아기가 있어서 먼저 인터뷰한다는 직원의 말을 들었다.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은 아이를 데려온 가족이 앉아있는 곳 빼고는 사실상 없어서 서있어야만 했다. 분신 같은 스마트폰이 없어서 남편이랑 강제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인터뷰가 시작됐다. 아기 안고 온 가족은 1번으로 인터뷰하고 떠났다. 비자를 받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남편은 비자 인터뷰라고 해서 무슨 방에 들어가서 면접 보듯이 인터뷰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은행 창구 같은 곳에 영사관 3명이 서서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는 대기줄에서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인터뷰 결과를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나와 남편은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워서 몹시 잘 들렸다. 영어로 인터뷰를 하거나 통역관을 요청해 한국어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아 글쎄! 자꾸 사람들이 거절을 당하며 오렌지 레터를 들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자신이 거절당하면 회사의 레전드가 된다고 떨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거절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체감상 3명 중 2명이 거절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렌지 레터를 받고 완전한 거절을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추가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그린 레터와 옐로 레터를 받고 돌아가기도 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됐다. 우리는 물구나무하고 봐도 한국인 2세인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루머에 따르면(?) 한국인 영사관에게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남편이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영사관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나는 주재원 배우자로 열 손가락 지문만 있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 옆에서 남편이 인터뷰하며 떠는 모습을 지켜봤다. 팝콘이 없었던 것이 아쉽다. 영사관은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님은 거기 가서 뭐하나요? 님은 회사에 얼마나 다니셨나요? 님이 미국 가서 몇 명을 관리하나요? 등등의 질문. 남편은 인터뷰 전에 예상 질문을 연습했다고 했고, 나와 연습하는 것은 거부했다(내가 영어를 더 잘함). 영사관은 주재원 후보 배우자인 나한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편에게 배우자의 실체가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인터뷰 현장에 존재했다.
남편이 대기줄에 서 있을 때 문득 “0이 네 개면 뭐지?”라고 묻길래 “ten thousand”라고 알려줬다. 남편은 어떤 질문에 (이쯤에서 나는 듣지도 않고 멍 때리고 있었다) 자신 있게 “ten thousand”라고 답했고, 영사관이 갑자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남편을 지긋이 쳐다봤다.
“How many zeros?(0이 몇 개냐?)” 하고 다시 묻는 영사관. 남편은 100,000을 말했어야 했는데, 10,000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영사관은 납득할 수 없는 숫자였는지 친절하게 남편의 수준에 맞춰서 다시 물어봤다. 정신을 차린 남편은 제대로 된 숫자를 이야기했고, 비자가 승인됐다. 비자가 승인되면 여권은 제출하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수 있다. 여권은 며칠 후에 다시 찾으러 가던가, 금액을 지불하고 택배로 받을 수 있다.
비자 거절당하면 안 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잠시 부풀었는데, 비자를 받아버렸다. 며칠 후 남편은 우리 가족의 여권을 찾아왔고, 우리 네 가족 여권의 한 페이지에는 미국 비자가 붙어 있었다. 미국 비자를 보니 실감이 났다. 가긴 가는구나.
+미국 방문 비자를 ESTA라고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이스타 비자라고 이야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미국인 영사관이 ‘에스타’라고 말해서 올바른 발음을 알게 됐다. 이스타의 출처는 어디인 것인가. 둘 다 맞는 것일까? 알고 싶지만 귀찮아서 찾아보지는 않고 그냥 안 궁금해하기로 했다. 나는 에스타라고 말하면 되지 뭐 ¯\(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