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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바디 Feb 24. 2022

미국 주재원 가기 전 준비_쟁신 똑바로 채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남편은 해외 관련부서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번은 꼭 최소 2주 이상의 해외 출장을 나가곤 했다. 언젠가 주재원을 갈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미국 주재원 발령 소식은 왜?라는 질문보다는 지금?이라는 질문이 먼저였다. 왜 하필 지금인가? 남편이 회사를 오래 다니긴 했지만, 팀장급은 아니기 때문에 애매한 위치였다. 그냥 위아래로 까이기 딱 좋은, 직급은 없지만 꽉 찬 과장 또는 갓 차장 단 정도의 느낌이랄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더욱더 애매한 미국의 시골이었다. 그냥 허허벌판에 남편 회사 공장이 덩그러니 있는, middle of nowhere라는 표현이 딱 알맞은 그런 곳이었다. 남편이 몇 년에 걸쳐 나에게 세뇌하다시피 주입한 주재원의 삶은 “주재원의 삶은 없다”였다. 미국에서 살지만, 한국 사람들 시간에 맞춰서 일해야 하고, 당연히 미국 휴일엔 쉬지 못한다(고 한다).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 언제나 일을 해야 한다. 야근은 숨 쉬듯이 하고, 아침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일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남편은 자신이 가족의 구성원에서 투명인간이라고 나에게 주문을 걸듯 암시했다. 그러니까, 미국에 가면 나는 남편이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그런 워딩은 아니었지만, 남편은 다른 주재원의 삶을 예로 들며, 나를 준비시켰다.


사실 한국에서도 남편이 그렇게 육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남편은 금쪽같은 내 새끼 한 편 보는 것도 지겨워했고, 육아 정보 같은 건 찾아본 적도 없다. 통근시간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했지, 육아정보를 알려주는 유튜브는 본 적도 없고, 나에게 본인이 알게 된 육아정보를 알려준 적도 없다. 남편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기저귀 브랜드는 하기스뿐이고, 우리 아이들은 하기스를 쓰면 발진이 나서 하기스를 쓴 적이 없다. 물론 남편이 육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밥 주고, 내가 사놓은 책 읽어주며, 나름대로 본인이 없었던 평일의 결핍을 주말에 메꾸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내가 여기서 뭘 더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아주 훌륭한 아빠라고 자부했다. 본인의 주장이 어떻든지 간에, 나에게는 그저 내 육아를 팔짱 끼고 관람하는 관객 정도의 위치에 계신 분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한다던가,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해서 불평하면 ‘너 행동이 그럴만했다’ 정도의 가스라이팅은 덤이었고.


이미 남편에게는 육아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졸라 힘들다고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두 아이 육아를 혼자 하면서 정서적인 지지도 제대로 못 받으면 사람이 미치기 딱 좋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육아가 힘들다고 눈물 흘리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 없는 내 육아 여정을 그러려니 하며 혼자 헤쳐 나가기로 하니 차라리 편했다. 그래서 미국에 가는 것이 딱히 두렵지는 않았다. 장소만 바뀌고, 내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나의 정신 상태였다. 한국에서는 어찌 됐든 어떤 식으로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살았다. 배달의 민족도 있고, 요기요도 있고, 쿠팡이츠도 있고. 새벽 배송도 되고, 문 열고 걸어 나가면 마트도 있고, 카페도 있었다. 6시까지 첫째 아이 맡길 수 있는 훌륭한 어린이집도 보내고,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 찾아서 아이들이랑 놀러 다니기도 하고. 급하면 아이 맡길 친정 엄마도 가까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랑 공감해주는 친구들과 엄마들이 가까이 있었다.


미국에 가면 내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던 이 모든 것이 없다는 것. 하지만 스트레스 요인은 그대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미국 이사 소식에 다들 ‘좋겠다, 부럽다’ 하며 부러워하니 “저는 죽고 싶어요” 하기도 뭐하고, 아하, 네 그렇죠 하하, 하며 한국에서 남은 준비를 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학교를 나와서 영어를 하는 것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잘하니, 미국에 가서 언어에 어려움이 없으니 정말 좋겠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언어를 전혀 모르는 유럽 국가로 가서 언어 때문에 고생하느니, 차라리 미국이 낫겠다.


나는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를 하며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출국 2주 전 대상포진을 시작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발광을 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가 겪고 있던 그 시간들이, 나 혼자 감당하려고 한 상황들이, 내 생각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작년 하반기에 남편은 3개월 동안 출장을 갔고, 한국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주재원 나간다고 송별회를 매주 했다(쓰다 보니 열 받네). 그 후 발령일자에 맞춰 먼저 출국하고 한국에 남은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보내고, 출국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남은 잡다한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 생각보다 더 나를 피로하게 했던 것이다. 아, 물론 이 모든 것에 육아는 디폴트였다. 대상포진 걸릴만했다ㅋㅋ


대상포진이 나아갈 때쯤에 너무 속 쓰려서 잠을 못 잘 정도로 속이 아팠다. 나는 평생 속 쓰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아, 이게 바로 속이 쓰리다는 것이로구나!라는 큰 깨달음을 얻고 출국 4일 전에 급하게 위 내시경을 받았다. 그리고 위궤양 진단을 받았다. 평생 위염도 안 겪어 봤는데, 위궤양이요? ㅋㅋㅋ 대상포진 걸리기 전부터 약간 속 쓰린 느낌이 있어서 국물 음식을 찾고는 했었는데, 이쯤부터 위염끼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그 후에 강력한 대상포진 약 때문에 구멍이 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실제로 아파서 잠을 못 잔 것은 대상포진 진단을 받은 이후이기 때문이다.


대상포진과 위궤양을 겪는 와중에 둘째가 열이 났다. 코로나 시국에 열이 나면 비행기를 탈 수 없다. rsv라는 열이 최소 3일 지속된다는 감기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스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결국 비행기 스케줄을 5일 정도 늦췄다. 내 몸과 마음이 썩어가고 있을 무렵, 남편은 미국 집에 철봉을 샀다고 전해왔다. 한국에서부터 사고 싶어 했던 부피가 큰 철봉인데, 넓은 미국집에 가자마자 산 듯했다. 철봉 소식을 듣고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목매달고 죽기 딱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봉에 묶을 끈은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냉정하게 나는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상태였다. 화가 나고 슬픈 감정을 넘어서서 무감정이 된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심리학 개론서만 읽어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애들 데리고 출국할 생각만 하느라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둘째 출산하고 살이 많이 빠지지 않았었는데, 다이어트를 할 생각도 없었다. 유일한 낙은 맛있는 것을 시켜먹는 것이었고, 둘째 출산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내 감정과 인생에 집중할수록 우울감이 몰려왔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나를 상처 주는 것들에게서 나를 분리시켰다.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도록 결국 나는 나 자신과도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위궤양 때문에 정신병 치료제를 먹을 수가 없네 / 오: 썩은 내 속

위궤양으로 난생처음 식욕을 잃었다. 나는 장염이 걸렸을 때도 식욕이 있던 인간인데! 밥을 먹으면 속이 쓰려 밥 먹는 것이 두려워졌다. 속이 쓰려 잠을 못 자니, 이제는 그냥 배만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피곤한 날들을 보냈다. 인생의  낙이 사라진 상태로 살려고 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위궤양 때문에 건강식으로 위장이 경건해져서 그런지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내가 외면하고 있던 나의 인생을 되찾아야겠다. 몸에 울린 사이렌은 내 정신도 두들겼다. 일단은 살아남고, 살아가야지. 내 자신을 바쁘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미국에서라도 정신과를 다녀오려고 한다. 브런치도 시작했고, 유튜브도 시작했다. 원래 하던 네이버 블로그에도 더 바쁘게 기록하고, 매일매일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꽉 찬 하루를 만들기로 했다. 하루하루 살아남다 보면 또 뭐라도 될 것이다.




미국에 와서 시차 적응 못하는 시간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유튜브 편집에 매달렸다. 우울의 노예보다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낫지 않을까? 유튜브 대스타가 돼서 돈이 많아지면 또 행복해지지 않을까? 내 행복은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막상 미국에 와서 맑은 공기 마시며 해야  일을 처리하다 보니 우울에 빠질 여유가 없다. 시차 적응을 못하는 편이라 낮이고 밤이고 처자느라 깨어있는 시간은 대부분 유튜브 대스타와 엄청난 작가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글은 한국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암울해서 올리지 말까 다.  어쩌라고 그냥 되는대로  쓰고 나는 정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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