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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룸어빌리티 Nov 01. 2020

휴가의 시작

Cinnamon-rolls-esteem

올해 초부터 손에 꼽으며 기다려왔던 한 달 휴가가 시작되었는데, 생각보다 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30일의 카운트다운을 쳐진 기분으로 시작하자니 우울함이 배가되어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휴가 시작 전 야심차게 맘 먹었던 중국어 공부 시작하기, 진로 탐색 등 무거운 일들 대신에 강력분 밀가루 한봉지와 드라이이스트, 그리고 계피가루를 샀다. 


밀가루 봉지를 뜯는 순간에 느껴지는 희열과 기대감 같은 것이 있는데, 어쩌면 이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빵을 굽기로 맘 먹을 때도 있지 않을까 싶다. 빵빵하게 부풀은, 윗면이 황금 갈색빛으로 변한, 따끈-한 빵을 그리면서 - from the scratch - 시작했다.


첫 시도는 기대와 사뭇 다른 빵덩이가 나왔다. 반죽을 너무 두껍게 밀어 계피와 설탕 대비 빵의 비율이 너무 많았던거다.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은 너그러울 수 있다. 잘 되어도 우연이 아닌가 싶고, 못 되면 그럴 수도 있지 싶다.


얼마되지 않아서 다시 밀가루를 열었다. 이전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반죽을 얇게, 더 얇게 밀었다. 반죽을 미는 순간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들었다. 

다시는 실패한 시나몬롤을 만들지 않을테다.


어릴 때부터 차보단 사람이 다니는 골목 어귀에 그 골목을 제패하는 빵집을 차리는 게 소박한 꿈이었다. 서울 연남동의 폴앤폴리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Boudin Bakery, 가족과의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중에 짭짤꼬소한 냄새가 바게트 충동구매를 일으켰던 말 그대로 가던 길 골목 어귀의 이름 모를 단칸 빵집...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My Favorite Things 노래의 가사처럼 기분이 별로일 때 언제 가더라도 맘이 좋아질 수 있는 빵집을 차리고 싶었다.  그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물주 정도는 되어야 맘 편히 빵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되기 전까지는. 어쨋든 지금도 나는 은퇴를 하면 골목 가득히 갓 구운 빵냄새로 메꿀 동네 빵집 차리기를 인생의 버켓리스트마냥 맘에 품고 산다.


왜 많고 많은 선택지 중에 굳이 빵집이냐 묻는다면. 첫째는 갓 구운 빵의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함. 아무리 기분이 괴팍해져 있을 때도 오븐에서 치열한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을 마치고 갓 나온 빵의 냄새는 옅은 환희와 온기를 선사했고, 그 덕분에 은근히 기분이 풀렸던 경험이 꽤나 있다. 밀가루 덩이를 잘 구워내서 파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환희와 온기를 줄 수 있다면 꽤나 해봄직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한가지 이유로는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맛'을 찾아가는 재미다. 나는 맛에 엄청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내가 만드는 음식이 어떤 맛이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에 있어서는 의견이 명확한 편이다. 잡채든 불고기든 버섯전골이든 약간의 매콤함이 감칠맛을 준다던가 (나는 이 감칠맛을 charming tanginess라고 생각, 아니 맹신하는 편이다), 설탕의 단맛은 은근한 것이 좋다던가. 그래서 표준 레시피에서 내가 좋아하는 맛들을 강조한 변주 레시피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변주된 레시피를 나만의 비밀 레시피 마냥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맛'을 구현해주는 최적의 레시피를 발견하기까지 여러번의 시행착오가 있기도 하지만, 마침내 이루었을 때는 아주 뿌듯하고 내 작은 지붕 아래 미슐렝 쉐프가 된 느낌도 든다.


두번째 시나몬롤을 만들면서 든 집착같은 생각도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맛'을 이번에야말로 찾아내어 그 뿌듯함을 느껴보리란 맘에서였을거다.


얼렁뚱땅 구워내지 않고 손끝에 힘을 주고 야무진 마음가짐으로 만든 두번째 시나몬롤은 대성공이었다. 내가 생각한 그 맛이었다. 쫀득한 반죽, 찐한 계피향, 그 사이를 메꾸는 흑설탕의 꾸덕한 달콤함까지. 아침에 눈을 떠서 쪼르륵 따뤄 낸 커피와 먹으면 갑자기 분위기 휴가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만의 비밀 시나몬롤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조금 신이 났다.


신명나게 삶을 추진해 나가려면 별 것 아니더래도 나만 아는 작은 성취들이 중요한가보다. 휴가의 시작이 찝찝했던 것에는 쉬기 직전 몇 주 간 직장에서 나도 모르게 쌓여있던 나에 대한 의구심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남들이 잘했다는 것과 별개로 내가 내 결과물에 만족하고 이 정도면 잘했다 느낀 지가 꽤 됐었다. 그래서 자기 확신이랄까, 내가 하면 된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기한에 맞춰 시간을 채운 결과물을 뭐라도 제출하는 느낌에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번아웃이라고 할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성장통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무엇이었든 간에 내게 필요한 건 작은 성취, 나 스스로가 나에 대해 뿌듯하고 대견해 할 수 있는 소소한 성취였던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시나몬롤은 먹는 사람마다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나는 내 기준에서 만족할만한 시나몬롤을 구워냈다는 것에 더 신이 났다. 그렇게 휴가의 시작은 두번의 시나몬롤 굽기와 함께 조금 더 신명나게 보낼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2020년 늦여름의 시나몬롤은 내가 하기만 했다하면 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위안을 주는 아이가 되었다. Cinnamon-rolls-esteem을 찾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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