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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룸어빌리티 Jun 30. 2024

나로서 나를 받아들이기

인사이드아웃 2

영화 자체가 정말 좋은 치유의 매개라고 한 심리학박사 정동선 님의 말처럼, 곱씹을수록 나를 안아주고 사람들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1. 모든 감정을 사랑하자

영화에서는 모든 감정이 빠짐없이 수용될 때 비로소 건강하고 다면적인 아이의 신념과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나는 외면하고 싶은 나의 기억이나 감정이 있진 않은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불안하고 질투가 많은 사람‘이라고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기쁨, 슬픔 같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감정들이 형성한 나만을 보이게끔 해왔다고도 생각했다.


영화를 놓고 최근에 나눈 두 가지 대화가 떠올랐다.


첫 번째 대화는 가끔 사람들이 ’나는 어떤 부정적인 면을 지닌 사람이야‘라고 솔직함을 빙자해서 하는 말들이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고 얘기한 친구의 말이었다. 매우 공감됐다. ”나는 불안하고 질투가 많은 사람이야“라고 선포한다고 해서 불안과 질투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도 좋지만, 나를 지속적으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것이 옳을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솔직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는 법은 아직도 알듯 모를듯하다.


두 번째 대화는 여전히 완전히 솔직해지지 못한 나에 대한 것이었다. 친언니는 나의 주된 감정이 기쁨이와 까칠인 것 같다고 했다. (앞서 내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감정을 선택적으로 보여준 결과일지도 모를텐데) 기쁨이가 나의 주감정이라는 얘기는 아주 많은 친구들로부터 들어서 덜 낯설었다. 다만 까칠이가 내 2차 감정이라고?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내가 정의하고 생각하는 나’는 이상향에 가깝다고들 하나보다. 여전히 나는 불안과 부러움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생각해서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지만 까칠이는 그저 까칠만 해 보여서 나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았던가보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 선민의식을 더 내려놓아야겠다고도 생각했고, 어쩌면 이상향적인 나의 자아와 남이 보는 자아 간의 간극을 좁혀가는 게 잘 살아가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2.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든다는 것인가 봐

우리 모두 기쁨이에게 너무 박하지 않은지. 실제 심리학 연구들에서 기쁨이라는 감정은 만 9세에서 절정을 찍고 남은 평생 감소한다고 밝혀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식적으로 기쁨이를 소환하고 싶어졌다.


어린아이의 기쁨이 상황이 정말 희망차고 완벽해서 기쁜 것이라면, 어른의 기쁨은 뭔가 결이 좀 다른 것 같다. 어머, 그런 거라면 기쁨을 재정의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요즘 내 기쁨의 원천들.

- 대화와 사랑이 많은 가족 (전에는 좀 귀찮기도 하고 나의 주체성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 힘든 회사 상황에도 서로를 응원하며 북돋아줄 수 있는, 때로는 아무말하면서 웃을 수 있는 에너지원인 팀원들 (전에는 조금은 질투하고 시기하고 경쟁의식으로 불안함으로 이들을 바라봤던 것 같다)

-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

- 꾸준히 운동함으로 늘어가는 근력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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