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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Oct 18. 2021

당신께 드리는 선물, 3개월

빼앗긴 들은 왠지 더 아름다울 것 같다.

유한한 것은 애틋하다. 졸업을 앞둔 한 달, 한 장 남은 달력, 입대 전 일주일, 냉장고 속 마지막 맥주 한 캔.. 얼마 남지 않았거나 그 끝이 예견되는 모든 것에는 아쉬움이 덧붙는다.       


기간을 정해 놓는다면 장벽을 친 것처럼 장벽에 가까워질수록 애가 닳는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도 그렇다. 재잘재잘 까르르 엉성덩성한 아이들이 딱 여기서 멈춰 그만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일 테다. 지금이 지나면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미래지향적 아쉬움.   

     

가족들과 시골에서 시한부 동거 중이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곧 있으면 명령에 따라 또 다른 근무지로 옮겨가야 한다. 아이들의 정서 안정을 생각해 첫째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즈음에는 한 지역에 정착하려 한다. 그렇다면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3년. 그 끝이 보이기에 애틋하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귀여운 실수, 성장의 면면에 아쉬움이 덧붙는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더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같이 지내며 아내와 협력하는 것이 좋을 듯 해 시골에서 함께 지내고 있지만, 출장과 파견, 교육, 파병과 같이 떨어져 지내야 하는 사정들이 이어진다. 올해 초 교육으로 4개월을 다른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나마 주말에는 집으로 올 수 있어 주말부부는 유지할 수 있었는데 웬걸, 다시 파견으로 3개월을 해외로 떠나야 한다. 아이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하다, 떠나기 1달 전 즈음에 떨어뜨리듯 스르륵 털어놓았다.       


최근 아이들을 재우는 새로운 방법을 발굴했다. 잠자리에 들어 아이들을 눕혀놓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누워서 뒤척뒤척을 넘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과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던 중, 생산적이면서 잠을 재촉할 수 있는 책 읽기를 시작한 것이 자연스럽게 고정되었다. 모두에게 유익하다. 읽는 나도 잠이 솔솔 온다. '누워라. 가만히 있어라. 돌아다니지 마라' 잔소리하지 않고 책 두세권 읽다 보면 어느새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가 나지막이 방 안을 채운다.     

  

그렇게 잠든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행복을 느끼는 여러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집에 들어서는 나를 반기며 신발장 앞에서 소리 지를 때, 깊은 잠에 빠져 뒤척이다 기척을 느끼고 살결을 부벼올 때,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눈으로 무릎에 앉을 때, 이것 좀 보라며 고사리손으로 접은 종이를 내밀 때, 산책하다 먼발치에서 양팔을 벌리면 냅다 뛰어와 나를 향해 몸을 날릴 때. 그런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면 입가엔 미소가 피어오른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가 몇 개월의 공백을 앞두고 보니 새삼 아쉽다. 소중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가치를 잊어버린다. 그래서 한 번씩 잃어보는 것도 소중함을 되찾는 꽤 유용한 방법이다. 숨을 1분만 참아보면 공기의 소중함에 감사하며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처럼.    

  

간헐적 이별 내지 강제적 별거가 때론 평범한 일상에 긴장과 자극을 제공해준다. 나쁘지 않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주 못쓸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려 한다.     


어려운 상황에선 긍정의 생각과 언어가 상황을 호전시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곳에 내 역량을 쏟는다면, 업무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      

좋은 점은 또 있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글감을 낳는다. 고갈되어가던 소재에 단비가 내리는 유익도 기대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지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즐기진 못하더라도 불평하진 않으려 한다. 불평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건 명확하니 말이다.      


빼앗긴 들은 왠지 더 아름다울 것 같다. 빼앗길 예정이 되어보니 알게 된다. 한 번씩 잃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한동안 주변인들에게 전하고 다녔다. 나는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아 애가 닳는다고. 당신들은 세 달 남은 기간을 선물로 생각하고 즐겁게 지내시라고.      



 여러분들에게도 권해본다. 내겐 없는 올해의 청명한 가을과 설레는 겨울의 초입을 유익하게 보내시길. 덤은 언제나 옳은 것이고, 꼭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될 유쾌하지 않은 일은 간접 경험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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