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코치 Oct 28. 2021

갑자기 찾아온 연말

미리 결산하는 유익에 대해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나에게만.


3개월 해외 파견을 앞두고 있어, 갑자기 연말이 들이닥친 기분이다. 코로나 이전의 해외 파견은 '업무시간 외, 적어도 주말'엔 관광이나 여가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이벤트였지만, 코로나 시대엔 그렇지 않다. 지정된 장소를 벗어날 수 없고, 여가나 운동이 통제된 환경에서 갇힌 듯 3개월을 보내야 한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가야 한다. 너 아니면 내가 해야만 하는 누구도 하기 싫은 일.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누가 갈 것인가? 

선발하는 논리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희망자 신청을 접수한다. 파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경력과 직급을 지정하고 신청자를 모집한 후('00분야 10년이상 근무경력자' 또는 '00병과 소령'과 같은 식으로), 신청자가 있다면 경력과 현재 근무지의 특성, 근무평가 등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인원을 선발한다. 신청자가 없다면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인원을 선발한다는 기존의 틀에 파견 경험은 있는지, 백신은 접종했는지, 특별한 개인 사정이 있는지와 같은 추가 요소를 고려해 지명 선발한다. 잃어버린 3개월에 당첨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과 노력으로 위기 돌파를 시도하고, 다양한 사연들이 등장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조직 분위기는 분명 긍정적 요소이지만, 요령 피우고 우는 소리 많이 하는 낯 두꺼운 사람들만 혜택을 챙겨가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이렇든 저렇든, 누군가는 가야 한다. 그렇게 지명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한 팀을 이뤄, 갑자기 찾아온 연말을 낯설게 맞이한다. 


연말엔 한 번 봐야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오랜 기간 만남이 통제되었는데, 때마침 파견을 앞두고 거리두기 기준이 완화되어 친한 동료들과 가족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군인들은 서로가 전국 각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 친한 동료와 같은 지역에 머물 일이 드물다. 내년에 헤어지면 또 어디서 재회할지 기약 없기에 고대하던 만남이 무척이나 반가운데, 아이들은 또 그 짧은 새 절친이 되어버린다. 파견을 일주일여 남겨 놓고 두어 번 더 만났다. 내년이면 또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질 사이, 나만 연말이라 혼자 애틋하다.     


떠나려니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은지.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 무엇 하나 이쁘지 않은 게 없다. 돌아오면 아이들은 불쑥 커 있을 테다. 4, 6, 8의 나이가 5, 7, 9가 되고, 애기애기한 귀여움이 한 겹 덜어진다 생각하니 뜻모를 아쉬움에 마음이 아리다.     


당겨 보내는 연말풍경

아직 한낮에는 반팔을 입어도 되는 그런 날, 땀을 삐질 흘리며 겨울옷도 꺼내 챙긴다. 돌아올 때는 한 겨울일 테니, 반팔 입고 오들오들 떨지 않으려면 잘 준비해야 한다. 아내와 진행하고 있는 '건강 되찾기 프로젝트'도 결말을 보지 못하고 떠나 아쉽다. 동력을 잃을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줄어드는 체중계 숫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 보이기에 잘 해내리라 기대한다.


떠나는 날 넌지시 던져봤다. '돌아왔는데 너무 홀쭉해져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아내가 볼살을 입안으로 쏙 넣으며 얘기한다. '그로묜 오똑하지?' 마주보며 웃다가, 아무래도 알아는 볼 테니 걱정 말라 일렀다.      


2022년이 눈앞에 다가왔다. 연말이 되면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목표했던 바를 잘 이뤘는지 평가하고 새로운 1년의 계획을 세우는데, 올해엔 3개월 앞서 점검해보게 된다. 정리해 놓고 보니, 미비한 부분 중에 해외파견기간 동안 보완할 수 있는 것들이 눈의 띈다.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하며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둔다. 

      

장롱면허인 아내에게 차를 맡기기 전 운전연수를 하다 첫날부터 전봇대를 들이받아 차를 바꿀뻔 했다. 큰 사고 없이 연수를 마친 후, 다행인 마음 반에 아쉬운 마음 반을 더해 아내에게 차키를 건넸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 돌아왔을 때 범퍼카가 되어있더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람만 다치지 않기를. 

  

떠나기 며칠 전부터는 날짜를 환산해서 생각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네. 이제 올해가 이틀 남았네 하며. 눈치 빠른 첫째가 묻는다. 오늘 크리스마스야? '아니 아빠 마음이 그래'라며 얼버무려 넘긴다. 연말을 당겨 보내니 미래를 사는 기분이다. 분주하고 아쉬운 나만의 연말을 보내고, 이제 남은 시간이 덤이다.

      

인생 전반전의 추가시간

어느덧 마흔이 눈앞이다. 덤으로 얻은 3개월을 인생 여정 전반전의 추가시간으로 생각하며, 후반전을 구상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려 한다. 요즘은 연장전이 기본 옵션이니, 후반전은 마무리가 아니라 교두보다. 더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무엇이든 미리 해보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여건과 상황이 강제한 경우라도 효과는 동일하다. 연말을 미리 보내보니, 두 번의 연말을 얻게 되었다.




2021년이 두 달여 남은 지금, 한해를 미리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리 결산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낸다면, 진짜인 두 번째 연말에는 아쉬움의 농도가 옅어질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께 드리는 선물, 3개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