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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Jan 16. 2024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고등학생이 5층 계단을 걸어 올라온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서 쇠로 만들어진 현관문 열쇠를 꺼낸다. 가로로 누워있는 구멍에 쇳대를 밀어 넣자 드르륵 쇳소리와 함께 열쇠가 맞춰진다. 왼쪽으로 힘주어 돌리니 철컥, 문이 열린다.


주황빛이 도는 신발장이 눈에 들어오고 신발 서너 개를 훑어본다. 저거랑 저게 있으니 엄마가 집에 계시겠구나 마음속으로 가늠하는데, 신발장 앞 장판 위에 엄마의 발이 보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르게 엄마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은데 울화를 녹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나’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당혹감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특별하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마음이 쪼그라든다.(담배도 안 피고,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술도.... 오늘은? 안 먹었고.. 뭐지..) 혼란스러운 머리로 마뜩잖은 대답을 못하고 얼어 있는 내게 엄마가 덧붙인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지. 속이 다 썩어 들어간다 아이가.’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이제 열한 시인데 왜 그래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 하다 공부할게 더 남아서 막차 타고 들어왔는데.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열 두시가 넘은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앞서,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틈이 없다.

‘한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속이 다 탔다. 어휴..’ 뒤돌아서며 휘청이시는 모습에 정신이 번뜩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은 제 멋대로 움직인다.

뭐 사서 걱정을 그렇게 하세요. 다 큰 남자 고등학생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방에 들어와서 진정된 마음에 죄송한 마음이 스며든다. 미리 연락드렸으면 저렇게 걱정하시진 않았을 텐데, 한 시간 동안 얼마나 걱정하셨으면 저렇게 얼굴이 상기되셨을까. 공중전화로 집 전화를 걸어야 했던 시절, 전화연락 보다 막차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고등학생에겐 전부였다.


그날 엄마는 왜 그렇게 걱정을 하셨을까? 아마 꿈자리가 사나웠거나, 평소와 다른 불길한 생각, 느낌이 엄습한 날이지 않았을까.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불길한 상상의 나래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그런 이상한 날.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데 연락할 수단이 없어 집에서 마음 졸이며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가 되셨을 테다. 그 이후로 평소보다 늦게 되면 집으로 먼저 연락을 하려 신경 썼던 기억이 있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후, 엄마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주말이나 휴가를 내 집에 들렀다가 먼 길 운전해 돌아가는 아들이 안쓰럽고, 늦은 밤 안전하게 도착했는지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 주말에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유난히 졸음이 쏟아지던 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얼른 씻고 자리에 누워 깜빡 잠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직이가?’


응? 뭐가요? 아.. 아까 도착했는데


‘.. 그래 잘 갔으면 됐다. 피곤할 텐데 어여 자라’


그 목소리는 옛날 막차 타고 들어왔다가 현관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휘청거리시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아.. 또 마음을 졸이고 계셨구나. 먼 길 가고 나면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제는 실수하지 않고 꼬박꼬박 챙긴다.


하나씩 알아간다.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걱정 끼치지 않게 연락을 드리려 하고, 일부러 더 하기도 한다.


평소에 안부전화 드리면 날씨나 건강 이야기 말고는 딱히 대화소재가 없기도 한데, 얼마나 좋은가. 늦어지는 이유, 잘 도착했다는 소식과 같이 전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제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많이도 내려앉았다, 녹았다, 뒤집혔다, 풀렸던 엄마의 마음이 더는 시끄럽지 않게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 뵈야겠다.     


오늘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인 것 처럼, 누군가와 함께 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중에서도 함께 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손 한번 더 잡아드리는 게 어떨까.      


소중한 줄 모르고 흘려보내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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