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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인연을 끊어야 할까요?"

[즉문즉설]-1

by 이안

“나를 자꾸 비난하는 친구, 인연을 끊어야 할까요?”


질문: “저에게는 대학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가 저를 너무 심하게 비난합니다.

제가 실업자가 되고 이혼까지 겪은 뒤부터

‘넌 끈기가 없다’, ‘능력이 없다’, ‘쓸모없는 놈이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 친구는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괴롭습니다.

이 친구와 인연을 끊어야 할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죠.

친구의 말이 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내가 힘들 때,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거나 깎아내리면

그 말이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존재를 흔드는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할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화를 내고 싶지만, 혹시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인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 순간에 우리가 봐야 하는 건,

‘그 친구의 말’보다 ‘그 말에 반응하는 내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거울의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타인의 말은 비추는 빛일 뿐,

그 빛이 내 안의 상처를 건드릴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남이 나를 욕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 욕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와 같다.”


이 말은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에 끌려가지 말라는 거예요.

욕이 내 마음을 흔드는 건,

그 안에 ‘자존감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나는 실패자가 아니다.”

그 믿음이 깨어질까 두려워서

친구의 말을 더 크게 느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가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솔직한 친구’, ‘조언하는 친구’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상처 입히는 사람을 곁에 둡니다.

그들은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우월감과 불안을 덮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위장된 지배 관계”라고 부릅니다.

상대방을 도와주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상대의 약점을 계속 건드립니다.

그건 우정이 아니라 관계 중독입니다.


《유마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혜 없는 자의 말은 칼과 같고,

자비 없는 충고는 독과 같다.”


진정한 조언은 들을 때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듣는 순간 숨이 막히고 자꾸 작아진다면

그건 이미 ‘도움’이 아니라 ‘해(害)’입니다.


질문: “그래도 오래된 친구라, 인연을 끊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렇죠, 인연을 끊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끊음’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건 미움으로 잘라내는 게 아니라

연(緣)을 놓는 연습이에요.


《잡아함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연이 다하면 억지로 붙잡지 말라.

붙잡는 손이 아픈 것이다.”


그 친구와의 관계가 당신을 더 작게 만들고

삶의 의욕을 갉아먹는다면,

그건 이미 배움의 시기를 지난 인연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웃고, 서로를 키워주는 관계가 아니라

죄책감과 상처로 이어지는 관계라면

그건 놓아야 하는 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거리 두기를 수행으로 삼으세요.

인연을 ‘끊는다’보다 ‘멀어진다’로 받아들이세요.

그 친구의 말에 즉각 반응하지 말고,

단답형으로만 응대해도 됩니다.


그게 미움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자비입니다.

자비는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의 마음을 해치지 않는 태도입니다.


둘째, 내 마음의 상처를 관찰하세요.

친구의 말이 나를 흔들 때,

그 안에서 어떤 두려움이 반응하는지 조용히 바라보세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그 질문을 그냥 바라보세요.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그 생각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습니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입니다.


셋째, ‘용서’보다 ‘이해’를 선택하세요.

용서하려고 애쓰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묶입니다.

“그 사람도 자신의 불안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그 친구 역시 인생이 힘든 겁니다.

자신이 불안하니까 남을 깎아내리며 안정감을 얻는 거예요.

그걸 알아차리면 미움 대신 연민이 생깁니다.


《법구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를 화로 갚으면 끝이 없고,

화를 참으면 그 자리에서 불이 꺼진다.”


이제는 그 불을 꺼야 합니다.

말로 싸워도 마음만 상합니다.

그 친구를 바꾸려 하지 말고,

그 말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세요.


처음엔 어렵지만, 흘려보낼수록 마음이 단단해집니다.

그렇다면 인연을 끊어야 할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 관계가 나의 평화를 해치지 않는가?’

‘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내 마음이 병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멀어져도 됩니다.

그건 버림이 아니라 해탈(解脫)이에요.

연을 놓는다는 건 미워서가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선택입니다.


삶에는 함께 가는 인연도 있고,

잠시 머물다 가는 인연도 있습니다.

인연을 붙잡지 못해 아픈 게 아니라,

놓을 때가 되었는데 붙잡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금강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


그 친구와의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당신은 이미 자유로워집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기겠습니다.


“진짜 우정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이제 그 친구의 말을 멀리서 바라보세요.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불안을 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지키세요.

그게 바로 자비의 시작이고,

이 관계를 초월하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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